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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인생이란 무대는

삶의 복병은 부비 트랩처럼 도처에 깔려 있다

  그녀의 부고(訃告)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며칠 조간신문을 볼 시간도 없이 상담예약이 밀려 바빴다. 아무리 바빠도 신문을 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고백하자면 나는 조선일보 중독자이다. 처음으로 보기 시작한 신문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원래 ‘첫사랑’이 무섭고 ‘첫인식’이 무서운 법이다. 또한 한번 좋으면 좀체 싫증을 내지 않는 성격 탓일 수도 있다. 


  요즘은 조선일보만 보지만 예전엔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한계레신문까지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진종일 신문만 뒤적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 후, 결심하고 모두 끊고 조선일보만 본다. 어떤 신문을 보느냐는 성향 혹은 취향의 문제라 생각한다.


  각설하고, 저녁을 먹고 이틀이나 지난 신문을 한가하게 뒤적이다 깜짝 놀랐다. ‘소설가 정미경(향년 57세)’의 부고기사가 실렸던 것이다. 물론 그녀와는 일면식도 없다. 그저 지면을 통해서 알 뿐이다. 고작 아는 거는 나는 1986년 등단했고 그녀는 1987년 희곡으로 등단한 걸로 안다. 그 후 그녀의 소설 ‘장밋빛 인생’, ‘아들의 연인’,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등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나보다 두 살이 어리고 이화여대를 나온 그녀의 글이 좋다고 느낀 건, 이년 전 쯤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인문의 향연’이라는 에세이를 읽으면서였다. 그때 처음으로 그들 부부가 부러웠다. 물론 정미경보다 먼저 서울대 교수이면서 화가인 그녀의 남편 ‘김병종’의 팬이었다.  


  몇 년 전 조선일보에 연재한 ‘화첩기행’은 말 그대로 나를 그의 ‘광팬’으로 만들었다. 글을 읽다가도 김병종의 얼굴을 자세히, 한 참 바라보기도 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약간 튀어나온 입, 그렇게 훈남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쩜 이 남자는 이렇게 ’뜨겁게‘ 글을 잘 쓸 수 있단 말인가.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내 속의 ’열정과 광기‘가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기 시작하는 걸 느끼곤 했다.


  김병종의 판화가 두 점이나 있다. 비록 일호짜리지만 말이다. ‘생명의 노래’ 시리즈다. 더욱 놀라운 건 어느 날 김병종의 아내가 소설가 정미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날 난 하루 종일 커피와 물만 마신 것 같다. 어찌나 부럽든지.


  정미경이 ‘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 문학상을 받았을 때도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참 곱고, 이쁜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참 복도 많구나 생각하며. 상대적 빈곤과 외로움에 오래도록 침묵한 기억이 난다. 재능과 미모와 학벌과 멋진 남편과 아들 둘까지.  


  신문의 생명력은 하루살이와 같다. 하루만 지나면 신문은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죽은 신문에서 내가 부러워하던 소설가 정미경의 부고를 보는 순간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 신문을 보지 않고 페기처분 했더라면 한동안 그녀의 죽음을 모를 뻔하지 않았는가. 


  처음엔 김병종의 팬이었지만 이 년 전부터는 그녀의 팬이기도 했다. 그녀의 ‘인문의 향연’ 에세이가 진주 목걸이를 한 귀부인 같다면, 내 산문들은 앞치마를 두른 부엌데기 같았다. 혹시 내가 너무 부러워했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런 생각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누군가를 많이 부러워하면 어느 순간 그 빛이 스러지곤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부러워했던 아이가 딱 한 명씩 있었다. 지금은 소원해졌지만 고등학교 때는 친하게 지낸 K가 있었다. 부잣집 딸에 피부가 뾰얗고, 이쁜 아이였다. 그녀는 여자대학 디자인학과를 가고 나는 남녀공학 사범대학의 디자인학과를 갔다. 학교가 달라지니 만나는 횟수가 뜸해지긴 했어도 난 항상 그녀가 부러웠다. 성격도 밝고, 책도 많이 읽고, 형제자매도 많았다. 외동딸인 나와는 달리 그녀는 딸 네 명 중 막내였고, 밑에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반드시 의사와 결혼할 거라고 했다. 여러 번의 선을 봐서 소원대로 의사와 결혼했다. 결혼도 같은 해에 했다. 난 첫사랑과 했고 그녀는 선 본 남자와 했다. 그녀는 5월에 했고 나는 6월에 했다.


  그녀도 아들을 낳고 나도 아들을 낳았을 때 한번 만났다. 그녀는 ‘말세(末世)’인데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낳자고 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의 언약’을 배신하고 딸 하나를 더 낳았다. 남편은 개업의로 돈을 잘 벌었고, 그녀는 집안을 유리알처럼 해 놓고 살았다. 아들 딸 모두 유학 보내고.


  K를 생각할 때마다 늘 조금 쓸쓸해지곤 했다. 어쩜 K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싶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흘러가 주지 않았다. 늘 삶의 파도는 나를 허공에 감아 올렸다가 가차 없이 맨땅에 내동댕이치고는 했다. 남편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엘도라도‘로 떠나는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이고, 아들은 반듯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스카이대 출신의 ’엘리트‘는 아니고, 나 또한 평생 죽을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문학은 ’지푸라기‘보다 힘이 없었다. 평생 글을 써오고 있지만, 글은 내게 밥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늘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삶이 끝장나는, 백척간두로 이어진 외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친했던 K와 나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데 얼마 전 K의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 문을 닫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때 나는 어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K를 너무 부러워했나? 하는 자책이 들었던 것이다. 


  대학 때도 부러워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친구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범대학 성악과에 다녔다. 같은 사범대학이라 교양수업을 같이 듣는 게 많았다. 시골에서 유학을 왔다고 했다. 내 눈에는 군계일학처럼 그녀가 아름다웠다.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어 ‘똥’머리를 하고 다녔다. 그 헤어스타일조차 마음에 들었다. 머리통도 예뻤고 얼굴도 아주 귀티가 났다. 직접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노래도 잘한다고 했다. 그 시절 나는 내 얼굴에 자신이 없어 늘 앞가르마를 탄 긴 머리를 커튼처럼 드리우고 다녔다. 


  그녀 또한 의사와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 잘 산다고 들었다. 그런데 한 십년이 흘렀을 때 쯤 그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였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몇날 며칠이고 마음이 아프고 불편했다. 혹시라도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있었나 하고. 


  또 한 십년이 흐른 후에 들은 소문은 그녀가 아들이 둘인 목사와 재혼해서 잘 산다고 했다. K도 남편이 많이 좋아져서 전원주택에서 잘 산다고 누군가 전해 주었다. 나는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건 내개인사적인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알려진,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던 저명인사들의 ‘추락’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도하는가.  


  가끔 나는 삶이 참으로 고달프구나하고 생각할 때마다, 초등하고 동창 ‘순희(가명)’를 떠올린다. ‘강남’에서 ‘성남’으로 이사한 해였으니, 한 십여 년 전 눈이 펄펄 오는 날이었다.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동창인 ‘김순희’라고 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미술대학을 갔으며 소설가인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등학교를 어디 나왔냐고 물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기 집은 가난해서 대학은 꿈도 못 꾸고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을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네 집 아직도 ‘갑부’제?, 하고 물었다. 갑부라니. 무슨 그런 말을... 그녀는 어릴 때 내가 가장 부러웠다고 했다. 부잣집 딸(그녀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에, 늘씬함 외모에 미대생이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대학 다니면서 중앙문예지에 소설까지 당선된 것이다. 그녀는 내가 신문에 난 걸 모두 오려서 스크랩 해 두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전화한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홍대 미대를 들어갔다는 것과 남편이 비행기 기술자라는 걸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였다는 걸 전화를 끊은 후에야 알았다. 훌륭한 남편을 만나서 부럽다고 하자, 퇴직하면 ‘카센터’도 못하는데 뭘, 하며 농담까지 했다. 그녀가 ‘엘도라도’로 떠났던 남편의 ‘부도’ 소문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잠시 생각했다. 그 날 나는 오래도록 오동나무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남의 부러움을 살 때 주의해야한다. 삶의 복병은 부비 트랩(booby trap)처럼 도처에 깔려 있어 잠시 방심하는 사이 언제 그 지뢰를 밟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여, 늘 겸허한 마음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 인생이란 무대는,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지 말고 그런 자신에게 격려와 선물을 준비해보자. 여행이든, 한 아름의 책이든, 그게 며칠간의 게으름이면 또 어떤가.


  2016년 12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정미경의 에세이다. 생애 마지막 글이 됐다. 인생이란 무대는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운명이 또한 신탁(神託)이라면, 미물인 인간은 순명(順命)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래도, 나는 그녀가 부럽다. 그녀는 현역인 채로 떠났던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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