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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그대의 울부짖음을 사랑하고, 그대의 절망을 사랑합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이육사의 ‘광야’ 첫 연이다. 이육사 여름문학학교 ‘광야’반 담임을 1박2일하고 돌아왔다. 초등학교학생부터 성인까지 문학학교 열기는 대단했다. 중요 행사는 시 암송대회와 백일장이었다. 내가 한 일은 그들이 시를 암송하고 백일장을 잘 치르도록 문학 전반에 대한 조언과 산문부문 심사를 하는 거였다. 


  암송은 이미 내가 지도할 것도 없이 줄줄 외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심사를 할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내 결정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알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으므로. 초등학교 4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을 때 심사를 한 여선생님이 “넌 글을 참 잘 써는구나. 나중에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 라고 한 이후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거였다. 그 때는 산문부문이었지만, 동아일보 소년소녀 글짓기 대회에선 시(詩)가 당선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시를 더 많이 썼다. 생각해보면 내가 시인이 아니고 소설가가 된 것 또한 어느 남학생의 말 한 마디 때문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1학년 5월, 어떤 경로로 영자신문 스튜던트타임사 학생기자가 되었는지 기억에 없지만, 아직도 그 임명장이 내게 있다. 아마 YMCA에 그 사무실이 있었을 것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그곳으로 가서 회의를 하거나, 책을 보거나, 기사를 쓰거나 하며 놀았다. 같은 학년 학생기자가 나 말고도 남학생 세 명이 더 있었다. 그 중에는 내가 다니던 여고와 같은 가톨릭 재단이면서 성당묘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D고에 다니는 남학생도 있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느 날 내 시 습작 노트가 없어졌다. 그 시절 꽃무늬가 연하게 프린트된 두툼한 시크릿 노트가 유행이었다. 그 두툼한 노트 가득 시를 썼고, 산문도 썼고, 때론 일기도 썼다. 말하자면 나만의 치기 가득한 ‘브레인스토밍’ 노트였던 것이다. 누가 가져가지 않고선 사라질 리 없었다. 내 분신 같은 노트를 멍청하게 분실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 쯤 그 노트가 사라졌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가을이 되면 내가 다닌 여고는 국화꽃전과 시화전과 문집전을 같이 했다. 그 축제를 하는 동안에는 금역(禁域)의 여고에 남학생들이 마음대로 들어 올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는 시간이었다. 시작 노트를 잃어버린 나는 어설프게나마 ‘미나리깡에서’라는 시화를 강단 벽에 걸고, 문집을 문집전에 출품했다. 일이학년 전원이 각자의 문집을 나름대로 엮어 전시했다. 


  내 시화 밑에 누군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붙여 놓았다. 다음 날에는 문집전 당번이 어떤 남학생이 내게 전해주라고 했다며 장미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내 문집 뒷장에 한마디를 남겼다.  


  - 그대의 울부짖음을 사랑하고,

    그대의 절망을 사랑합니다. 

                           옆집 K가.


  카프카의 K도 아니고, 옆집 K라니. 옆집이라면 D고가 아닌가. 그리고 사랑이라니. 나는 더러운 구정물이라도 튄 듯 기분이 나빴다. 축제는 끝이 났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걷고 또 걸었다. YMCA에 나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고3이 되면 대입준비를 위해 모든 서클 활동을 그만두었다. 어느 바람 부는 날 사무실에 갔는데, D고 남학생이 잃어버린 내 시 습작 노트를 주며 한 마디 했다.


  - 시는 아니네요. 산문 쪽이지.

  얼굴에 화롯불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나는 그 노트를 더 이상 찢을 수 없을 때까지 찢어서 버렸다. 그 후 다시는 YMCA 사무실에 가지 않았다. 그것으로 나는 문학과 결별했다.


  학생기자 선후배들과 책을 읽고 토론도 많이 했었는데, 이름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남학생 때문에 그 시절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렸는지 모른다. 고3이 되어 나는 미술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오빠는 서울로 유학을 갔지만, 나는 서울로 가지도 못하고 지방대학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학교에 정을 붙일 리 없었다. 매일 도서관에서 소설을 썼다. 문학과의 결별은 속절없는 내 머리와의 약속일뿐, 내 가슴은 그 약속 따윈 지킬 수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쓴 단편소설 ‘아내에게 들킨 생(生)’이 시문학이 주최한 전국대학생 문예 소설부문에 당선 되었다. 정을병 선생님이 뽑아 주었다. 웬 미대생이 소설에 당선되자, 대구매일신문에 기사가 나기도 했다. 시인이기도 한 L기자의 기사인 걸로 안다.


  ‘나는 아내의 애벌레였다.’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이상의 날개 오마주였다. 그러고도 대학교 3학년 때는 동성로 ‘유경 다방’에서 시화전도 했다. 뉴욕에 사는 내 절친 J는 아직도 그 ‘천마시화전’ 팸플릿을 간직하고 있다. 문단에 이름은 못 올렸지만, 그녀의 시 ‘바래움’은 김춘수 선생님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 때 같이 시화전을 한 사람 중 문단에 나온 사람은 현대문학에 있다가 소설로 등단한 강석하와 시인 서정윤 정도였다. 서정윤은 D고 출신이고, 나중에 시집 ‘홀로서기’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D고에는 ‘태동기’라는 유명한 문예반이 있었다. 나를 문학과, 아니 시와 결별하게 만든 D고 남학생이 문집전에 꽃을 두고 간 ‘옆집 K' 였는 지 알 수 없다. 또한 그가 태동기 멤버였는지도 알 수 없다. 물증은 없지만 그러나 심증은 있다. 감히 남의 인생에 끼어들어 훈수를 할 정도면 어느 정도 문학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쯤 내 앞에 나타날 만도 한데 여태 ‘옆집 K'는 만나지 못하고, 수많은 태동기의 ’옆집 K'들이 줄줄이 문단에 이름(서정윤 박덕규 권태현 하응백 안도현 이정하 김완준 최보식 이경식 조성순 등등)을 올렸다. 꽃을 든 남자는 휘발성이 강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원고의 이름을 가린 채 산문부 심사를 했다. 자칫 남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쌍쌍바’를 첫사랑에 비유한 남학생과 아들의 담임선생님(남자)을 짝사랑한 얘기를 쓴 두 작품을 뽑았다. 진솔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묘사한 걸 높이 샀다. 첫사랑이나 짝사랑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한다. 사랑에 상처 받은 사람을 위무해 주는 것 또한 문학의 소임 중 하나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이육사의 ‘광야’ 첫 연은 언제나 D고의 문예반 ‘태동기’를 떠올리게 한다. ‘태동기’를 떠올리면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옆집 K'가 생각나곤 했다. 그들이 벌써 50주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대단한 태동기다. 


  ‘태동기’는 영원히 ‘태동기’여야만 한다. 알에서 깨어나길 거부하는 새처럼, 3세에 성장이 멈춰버린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피터팬‘처럼, 그들이 영원히 소년이길 바란다. 알에서 깨어나거나, 청년이 되거나, 어른이 되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태동기인 지금도 문단을 휘젓고, 남의 인생에 끼어들기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어디 닭 우는 소리 들을까 겁이 난다. 그들 중 누구라도 닭 우는 소리 듣고 서서히 깨어난다면 세상이 위험해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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