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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의 장편소설]아프로디테의 숲2-2

사랑이란 매번 눈물처럼 순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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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이처럼 눈이 오는 날 혼자 우두커니 창 밖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바람 부는 벌판에 버려진 아이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너는 막막했다. 어디 바람 피할 곳 하나 없었다. 너는 끝없이 두리번거린다. 아내와 결혼한 이후에도 너는 아내에게 정착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개 외형이나 조건들만으로 충족되는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다. 

  너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끝없이 네 자신에게 세뇌시켰다. 그러자 정말 아내를 사랑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착각은 금세 실체를 드러냈고, 너는 아득한 길 위에 서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사랑 받지 않고는 죽어 있는 삶 같았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엄밀히 말해 교접)하는 순간만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수술이 힘들거나 문전성시를 이룰 때는 더욱 그러했다. 낮에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와야지만 오후 수술을 편안히 할 수 있었다.

  너는 섹스증후군에 시달렸다. 섹스가 해결되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섹스증후군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너는 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넌 이미 사랑을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코드가 훼손되어 있었다. 아내와의 섹스는 물론이고 새로운 여자들도 몇 번만 만나면 금세 시들해졌다. 그리하여 정신의 교감이 없는 섹스는 가도 가도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네 열정은 소금물을 들이킨 사람처럼 더욱 심한 갈증으로 허덕이게 되는 것의 반복이었다.

  넌 수렁에 빠진 네 영혼을 붙잡기 위해, 흡연자가 잠시 금연을 하듯 한동안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여자를 만나지 않고 얼마나 견디나 스스로 실험해 보고 싶었다.

  병원 일이 끝나면 혼자 인사동으로 갔다. 어릴 적 그림을 잘 그려 상을 많이 받기도 한 너는 한때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잠시 가진 적도 있었다. 너는 사실 화랑을 돌며 그림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흑인 낙서화가 ‘바스키아’의 전시회를 보았고,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도 보았다. 인사동이 지겨우면 대학로로 가 어슬렁거리곤 했다. 거리의 사주쟁이에게 네 사주를 보기도 했다. 그 사주쟁이는 오십이 넘어야 돈이 모이지 그 전의 돈은 자갈에 물 붓기 식으로 모두 빠져나간다고 했다. 또 여자가 너무 많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다는 말도 했다. 네가 쓸쓸한 표정으로 일어서자, 곧 나타날 여자는 오래 가겠다고 위로의 말을 던졌다. 소극장에서 ‘유진규의 판토마임’을 보기도 하고, 거리를 서성이다 파랑새 극장 옆의 창 넓은 찻집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보기도 했다. 여자들의 튀는 옷차림이나 행동들이 모두 외로움에서 기인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느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너는 동숭 아트센트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일본영화를 보았다. 일본영화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일본영화를 볼 생각 따윈 없었는데 길게 줄을 서 있는 게 신기해 너도 그 줄 끝에 서 있어 보았다. 달리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주인공은 바람을 피운 아내와 그 애인을 현장에서 칼로 찔러 죽인 후, 피묻은 칼을 든 채 경찰에 자수하는 건 생각난다. 애인과 섹스를 즐기던 아내는 발가벗은 채 남편이 사정없이 찔러대는 칼 세례를 받고 남편을 바라보며 죽는다. 그 후 형을 살고 나온 주인공이 조용한 시골에서 뱀장어 한 마리를 키우며 살아가다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였다.

  그날 너는 주택을 개조해 만든 카페 이층에서 혼자 양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마당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하나 서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이 노랑나비처럼 난무했다. 한 순간 바람과 몸을 섞은 나비는 최후의 아름다움을 맛 본 후, 미련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는 수많은 노랑나비의 주검이 잔디처럼 깔려 있었던 게 생각난다. 그 남자는 아내를 진정 사랑했을까? 너는 노랑나비의 주검을 노려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아내의 부정을 알았을 때 네 가슴에 분노는 없었다. 다만 외롭고 쓸쓸할 뿐이었다.

  6

  그러다 H를 만났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끌린다는 건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H의 무엇이 그처럼 너를 달뜨게 했는지 알 수 없다. H는 아직 순백의 땅처럼 정신의 순결이 훼손되지 않고 있었다. 네게 떨며 다가오는 H는 단 한 번도 더럽혀지지 않은 첫 마음임을 알 수 있었다. 저 나이에 아직도 저럴 수 있다니. 넌 얼마나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여자만 만나왔는가. 널 사랑한다고 징징거리는 여자조차 이기심 덩어리들이었다. 아내야말로 그 대표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는 어쩜 그리도 자신만 아는 여자인지. 그녀가 널 선택한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섹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섹스를 매우 즐기는 여자였다. 아마 너처럼 그녀를 만족시켜주는 남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희석시킨다. 아내에 대한 열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점점 남매처럼 느껴져 성욕이 일지 않았다. 너는 아내에 대한 성욕을 잃지 않으려 연인처럼 가끔 러브호텔을 이용하기도 했다.    아내는 너무나 이성적인 여자다. 남편인 네게는 물론이고 딸에게조차 그랬다. 어린 딸이 운다고 덥석 안아주는 법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는 두 돌 지난 어린 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어둔 방에 가둔 적도 있었다. 어릴 때 독일의 기숙사에서 컸다는 아내의 이성적인 행동에 너는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녀에겐 측은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지난 여름 내내 H는 땀이 많은 너를 위해 황기를 달려 왔다. 아내에게서조차 기대할 수없는 일이었다. 아내가 들으면 코방위를 뀔 것이다. 오히려 잘 해 보라며 야유를 보낼 게 뻔했다. 아내는 은근히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우(愚)를 범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지금 만나고 있는 여섯 살이나 적은 골퍼와 재혼할 지도 모를 일이다.

  넌 절대 아내와 이혼하지 않는다. 아니 이혼당할 수는 없다. 네 인생에 이혼이란 없다. 이혼이란 삶의 실패라고 너는 생각한다. 실패? 너는 절대 이 생에서 실패하고 싶지 않다. 실패한 사람은 아버지 혼자면 족하다. 자라면서 신물이 나게 보았다. 실패한 남자의 삶이 얼마나 누추한가를.

  나이가 들면 생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놓여날 줄 알았다. 그러나 미혹(迷惑)에 흔들림이 없을 나이인 불혹(不惑)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네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질기고 독한 피해의식은 삭을 기미가 전혀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너의 암흑기였다. 이 독한 피해의식과의 치열한 투쟁기였다. 넌 피해의식이라는 괴물과 싸워 이기기 우해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골방에서 공부만 죽으라 했다. 새어머니가 무능한 아버지에게 돈 벌어 오라고 퍼부어 대는 그 지긋지긋한 악다구니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약솜으로 귀를 틀어 막아가면서. 서울의 명문 의과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해 신문에 네 얼굴이 났을 때 넌 이 싸움에서 이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전혀 복원되어 있지 않았다. 한번 훼손된 영혼의 상처는 잠시 잊혀지긴 하지만 복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는 몰랐다. 네 여성편력도 거기서부터 출발한 건지 모른다.

  연애중독자는 애정결핍증 환자의 다른 이름이다.

  핏덩어리인 너를 버리고 너 보다 세 살 위인 누나를 데리고 집을 나간 잘난 생모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얼굴도 모르는 생모의 소식은 마지막으로 들은 건 성북동에 사는 막내 이모에게서 였다. 

  “k라고? 그래 니가 k란 말이지..... 네 어머니 잘 계신다. 벌써 십 년 전에 국제결혼 한 네 누나 따라 미국 갔다. 처음엔 어려운 것 같더니, 지금은 달라스의 한인타운에서 한강이라는 갈비집을 하고 있다......”

  달라스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곳이라는 것밖에 아는 게 없는 도시이다. 달라스라는 이름은 왠지 사막의 한 가운데 있는 도시 같다. 라스베가스라고 하면 뉴욕에 있는 것 같고. 내일이라도 당장 달라스로 날아가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생각을 품고 살아온 지 벌써 십 년이다. 그 당시 미국 비자를 내 놓았지만 유효기간이 다 지나도록 미국행 비행기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 너는 가끔 달라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들고 비행기 시간을 놓칠까 봐 쩔쩔매는 꿈을 꾸곤 한다. 그럴 때마다 넌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 끊었던 담배를 입에 대곤 했다.

  7

  너는 매일 아침 H에게 전화를 했다. H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너는 H를 깨워주는 뻐꾸기시계 노릇을 기꺼이 했다. 열한 시 십 분이나 이십 분 혹은 삼십 분, 아침에 예약 수술을 한 건 하고 나오면 그 시간이 된다. H는 네 기쁨이었다. 네 생명줄 같았다. 수술 장갑을 벗어 던지며 너는 H에게 전화를 했다. 방금 잠에서 빠져나온 H의 목소리는 언제나 네 아랫도리를 찌릿하게 자극했다. 당장 전화 속으로 기어 들어가 H의 옆자리에 눕고 싶곤 했다.

  하루 종인 점심도 거른 채 수술을 한 어느 날, 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H를 병원으로 불렀다. 초록색 수술 모와 수술 복을 그대로 입고 앉아 H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H가 올 때까지 눈을 감고 오로지 H와의 섹스만을 염원했다. 그날 H가 거부했다면 너는 H를 폭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너는 H를 원했다. 그 순간, H가 아니면 안 되었다.

  너는 너무 급해 회복실로 H를 데리고 들어갔다. 찌걱거리는 링거액 거는 스테인리스 막대 때문에 잠시 어색했지만 괜찮았다. 손을 뻗어 얼른 뽑아버린 후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H는 그 날 울었다. 물론 H는 처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처녀처럼 울었다.

  어쩜, 사랑이란 매번 눈물처럼 순결한 건지도 모르겠다.

  만약 H가 처녀였으면 너는 그녀가 싫었을 것이다. 너는 오래도록 H를 안아 주었다.

  넌 H집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믿을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정말 H와 살고 싶었다. 그 눈이 새카만 작은 여자와 같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맞고 싶었다. 그 욕망은 혀뿌리에서부터 밀려오는 니코틴에 대한 그리움보다 강렬했다. H의 집을 들랑거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네 마음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질 건 자명한 일이었다. H와 이 세상의 아침을 단 하루라도 같이 맞이하게 되는 날엔 넌 아내에게서 버림받을 게 뻔했다. 넌 두 번 다시 버림받기 싫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한다.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신윤희다. 병원 앞에 왔으니 내려오란다. 너는 시계를 보며 계단을 내려간다.

 

  8

  신윤희는 너를 데리고 복어전문일식집으로 간다. 첫눈이 와서인지 식당을 메운 사람들이 다소 들뜬 분위기이다. 식탁 위에 청주병이 올라 있는 테이블이 보인다.

  “사모님 오셨어요!”

  반색을 하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신윤희와 너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안내되어 앉는다. 신윤희는 복 매운탕을 시킨다. 신윤희는 분명한 구석도 있다. 자신이 만나자고 한 날은 자신이 돈을 썼다. 주뼛거림도 없이 이 집은 복 매운탕이 좋다며 그걸 시켰다. 궁기가 없는 신윤희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몸에 걸고 차고 있는 반지며 시계, 목걸이를 모두 합치면 일 억은 될 것 같다. 그렇다고 교양 없이 거만하게 굴거나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자기 분수에 맞게 팁도 적당히 잘 주어 어딜 가든 귀부인으로 대접받았다.

  “휴대폰 받으세요.”

  병원까지 오며 본 삼중추돌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다말고 신윤희가 말한다. 너는 그녀의 얘기에 집중하느라 네 안주머니에서 울어대는 휴대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전데요......”

  H였다. 깊은 우물에 빠져 있는 듯한 목소리다.

  “아, 네. 지금 손님과 점심 먹고 있어요. 나중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너는 사무적이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고 휴대폰을 접는다. 신윤희는 촌스럽게 누구냐고 절대 묻는 법이 없다. 그녀는 하던 얘기를 마저 했다. 음식이 날라져오자 그녀는 청하를 시킨다. 네가 쳐다보자 오후에 수술 스케줄 없다고 하던데요, 하고 싱긋 웃는다. 그녀는 이미 간호사 네 명에게도 뇌물을 써 모두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두었다.

  9

  청하 한 병을 나누어 마시고 길 건너 새로 단장한 호텔로 갔다. 커튼을 젖혀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밖은 짙은 눈이 내려 방안은 어둑하다..너는 신윤희 위에서 피스톤 운동을 하며 창 밖을 힐끔힐끔 본다. 자꾸만 H 생각이 난다. 너는 머리를 흔들며 시(詩)를 외운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 숙제로 외워 유일하게 다 외울 수 있는 시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

  너는 김영란의 시를 외우며 섹스를 한다.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너는 왈칵 눈물이 난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H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다. H가 꼭 모란처럼 저 눈밭 속으로 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너는 서둘러 사정을 한다.

  “미안해, 아직 못했지?”

  “아니, 좋았어요.”

  신윤희는 프로답게 널 무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넌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다. 

  “벌써 나가게요? 들어온 지 삼십 분도 안 됐어요.”

  “어디 잠깐 들릴 때가 있어.”

  “그럼 먼저 나가세요. 전 조금 있다 나갈게요.”

  너는 미안하다며 신윤희를 한 번 쳐다보고 나온다. 마음이 급하다. H에게 전화를 한다. 통화 중이다. 끊고 다시 H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누르려 할 때, 전화벨이 울린다. 홍 간호사다.

  “원장님, 멀리 계세요? 민국희씨가 기다리고 계신데요.”

  홍 간호사의 모소리가 불길하다. 너는 H에게 가려던 발길을 돌려 병원으로 간다. 민국희 씨는 창(唱)하는 여자다. 아마 또 그 조카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10

  병원에는 세 명의 여자가 와 있었다. 모두 창하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화장을 가면처럼 두텁게 하고 다녔다. 세상에 대한 깊은 원한과 두려움, 열등감, 짐작할 수 없는 찌든 궁기, 혹은 불행을 짙은 화장 속에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 중 얼굴이 맑은 사람을 넌 본 적이 없다. 모두들 위궤양 환자들처럼 양미간을 찡그려 붙이고, 귀뚜라미같이 어두운 두 눈엔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자글거리고 있었다. 그런 여자들에게 한 번 물리면 골치 아파진다. 넌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눈빛이 맑지 않은 여자와 잠을 자는 일은 네 사전에는 없다.

  민국희 씨는 네게 눈가 주름을 펴는 시술을 받은 이후 여러 명의 환자를 소개해 왔다. 넌 창하는 여자 민국희 씨가 네 병원을 우연히 찾아 왔을 때, 짐승의 본능으로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 다정하게 대했다. 이 여자를 잡으면 고구마줄기에 딸려 올라오는 고구마처럼 환자들이 줄줄이 이어져 올 것임을 너는 단번에 알아 차렸던 것이다. 그 욕심이 과했던가. 결국 화(禍)가 네게 튀었다. 

  그녀 밑에서 창 공부를 하는 조카를 데리고 민국희 씨는 혼자 살았다. 너는 민국희 씨와 그 동료들과 저녁도 먹고 노래방에도 갔다. 너는 동시에 대여섯 여자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모두들 다 네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탁월한 노하우가 네겐 있다. 돌아가며 블루스를 추게 될 때마다 그녀들을 정성 들여 껴안아 준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때도 결코 양손과 양 허벅지가 노는 법이 없다. 양옆의 여자들 허벅지에 네 허벅지를 딱 붙이고, 양손은 네 옆의 옆 여자의 어깨에 가 있고, 눈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그 정도면 다섯 명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표시를 하기엔 충분하지 않은가. 넌 가끔 네 자신이 그럴 때마다 남창(男娼)같다고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자신을 팔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고고한 척하는 선비조차 매문(賣文)을 한다. 성직자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팔아먹고 살기는 마찬가지라고 너는 생각한다.

  너는 눈발 속을 부지런히 걸어 길을 건넌다. 홍 간호사의 불길한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민국희 씨는 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하는 스물한 살짜리 조카 여자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 조카는 반반하게 생겼다. 그런 대로 얼굴이 조화를 이루었고, 상당히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외모에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쌍꺼풀 수술을 네가 집도했다. 날카롭고 쌀쌀맞아 보이던 인상이 온화하고 부드럽게 변해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 조카는 밤이고 낮이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눈이 짝짝이로 되었다고 절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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