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스승이란 무엇인가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며, 디자인의 생명은 심플이다

  점령군처럼 들이닥친 폭염에 철없는 감기몸살로 근 보름간 아팠다. 문득 달력을 보니 5월 15일이었다. 5월 15일은 국정 공휴일은 아니지만 나라가 정한 ‘스승의 날’이다. 어쩌다보니 대학원까지 나오게 되어 거의 20년 가까이 학교를 다닌 셈이다.


  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문예창작을 전공 했다. 교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면 진작에 대학원을 미술대학으로 갔을 것이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천재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내 대학 때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꿈은 오로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을 때 어느 여선생님이 나중에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고 칭찬한 이후 내 꿈은 작가였다.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었으니 꿈을 이룬 셈인가? 


  등단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대학 때의 스승 L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 교수님, 교수님을 배신하고 저 문학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들뜨고 흥분된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 그래? 야아, 정말 축하한다. 배신은 무슨, 그 길이나 이 길이나 똑같은 길이야. 늘 지켜볼테니 열심히 해.

  늘 지켜보신다는 말은 천군만마를 내게 보내준 것 같았다.


  감히 말하건대 내가 L교수의 첫 제자이면서 그는 나의 마지막 스승이다. 그는 내가 대학교 3학년일 때 처음 부임해 오셨다.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몸은 퉁퉁한 편이었다. 머리는 베토벤 머리였고, 웨스턴스타일의 콧수염을 길렀으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청바지에 와인색 구두로 포인트를 주었다. 첫인상은 귀여운 팬더곰 같았지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 던 어떤 교수와도 달랐다. ‘그래픽 디자인’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말이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응용미술’ ‘상업디자인’ 등으로 불리며 순수미술보다 한 수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L 교수가 부임해 오면서부터 지방대학의 디자인학과는 눈부신 발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재능에 질투심을 느낀 둔재교수들의 텃세를 견디기도 했다. 


  광고는 자본주의 꽃이다. 포스터, 신문 잡지의 광고, 카탈로그, 책표지, 포장, 기업의 로그, 패키지 등등 모두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몫이다. 그는 천재였다. 사물이나 인물의 성격이나 특징을 단번에 파악하여 더 이상 한 점도 뺄 수 없을 지경까지 단순화시켜 하나의 ‘캐릭터’를 완성했다.  


  그의 일러스트레이션 중 압권은 당연 한국의 여인상 시리즈다. 한국을 알리는 관광포스터의 족두리를 쓴 여인부터 시작해 장옷 입은 여인, 연실과 여인, 폭포를 찾은 여인, 성춘향, 시집가는 날, 나들이, 섬마을 소녀, 춘희... 얼굴 윤곽을 전혀 그리지 않고 눈과 입술만 그려 넣었는데도 우리는 얼굴선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화려하며 근엄한 검은색에 최소한의 단순화 된 형태, 유용하게 채워진 여백은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전부’라고 했다. 그 외 소나무, 억새, 물, 바람과 산, 새, 들, 풀이 어우러진 노래가 그의 그림 소재들이었다. 그가 천재임을 확인하고, 디자인의 생명은 ‘심플(Simple)’이라는 한 마디만 기억하고 대학을 졸업했다.  


  - 정영희는 말이야, 키가 커서 키 작은 천재를 다 놓치겠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내 키는 165센티미터다. 아, 5센티만 작았어도 천재를 만날 수 있었을텐데.


  그 후 가끔 그의 작품전에 가서 선후배들을 알게 되었다. 선배들은 딱히 그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스승으로 모실 사람이 없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권위나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뒤풀이에서 술을 마시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 느끼게 했다. 언제나 유머러스하게 화제가 풍부했고, 먼저 스스로를 디스하기 때문에 누구도 폼 잡고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웃을 때의 그 천진함은 모든 사람의 무장을 해제시켰고, ‘말술’을 당할 자는 없었다.


  그의 주위에는 늘 제자들로 들끓었다. 재능이 있든 없든, 잘 나가든 못나가든, 언제나 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 주었고, 사소한 추억을 기억해서 들려주곤 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편견이 없었다. 


  나는 잠시 배웠지만 내 후배들은 그의 수액을 먹고 자라, 엄청난 일러스트들이 되어 있었다. 그의 제자 중 교수가 된 사람이 스물다섯 명 쯤 된다고 들었다. 


  그런 그가 삼년 전에 정년퇴임을 했다. 그 전에는 굳이 내가 챙기지 않았다. 그러나 퇴임을 한 이후는 5월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나와 친분이 있는 선후배 12명쯤을 '톡방'으로 불러 모아 날짜와 시간을 정해 저녁을 먹고는 했다. 인생을 살아가며 스승의 날에 밥한 끼 같이하고 싶은 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교수님,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제가 지금 감기몸살로 끙끙거리느라 선후배들과 교수님 모시고 밥 함 먹자는 소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단 이렇게 L 교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고맙다는 답글이 왔다. 그러고 한 닷새 쯤 지나자 몸살이 그만한 거 같아 선후배들에게 단체톡을 했다.


  - 교수님, 선배님 후배님. 다음 주 저녁 함 뭉칩시다. 되시는 요일들 올려주시고, J 후배님은 장소 시간 부탁드립니다. 회비는 3만원.


  오전 8시 쯤 보내고 잠시 바쁘게 지내다가, 오후 3시 20분 쯤 생각이 나서 톡을 확인했다. 깜짝 놀랐다. 세상에 무플이었다. 

  - 어머나 다들 대학을 여러 군데 나오셔서 만나야 할 교수님과 선후배가 많으신가 봅니다. 저는 Y대학교 밖에 안 나와서, 일 년에 한번 쯤 5월이면 만나고 싶은 분들이 여기 초대한 교수님과 선후배님들 밖에 없답니다. 다들 대통령보다 더 바쁘신가 봅니다. 저 혼자 소중한 분들이라 생각해서 죄송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들 사세요.


  이렇게 문자를 보내고 톡방에서 탈퇴했다. 그랬더니 곧바로 J후배와 또 다른 후배가 나를 다시 초대해서 화 푸시라고 했다. 식당 정해서 톡 하려고 했다고 사과했다. 두 명의 후배가 더 못나온다는 답글이 올라오자, L교수가 다음 주는 속초에 있어야 할 일이 있어서 참석이 어렵다고 응답했다. 


  펙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L교수는 제자들에게 폐 끼치기 싫어서 그렇게 핑계를 댄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겨울에는 막내가 결혼했다. L교수는 자녀가 네 명이다. 위로 딸 셋에 막내가 아들이다. 그 막내 결혼식에 청첩장 보내는 게 무슨 죄인 같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L교수는 지금 가족과 떨어져 속초시에 위치한 ‘아야진항’에 있다. ‘황야의 이리’처럼 홀로 자신의 동굴에서 대양을 마주하고 지낸다. 어느 날 동해의 일출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맹수는 때가 되면 하이에나 떼들이 들끓는 들판에서 물러나 자신의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다.


  결국 L교수가 서울에 올라 올 때 날을 잡자고 하고 마무리 되었다. 그로부터 나는 한 달을 더 아팠다. 오늘은 2017년 6월 15일.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 전기장판을 끼고 누워 스승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다. 


  그가 퇴임하고 고작 세 번째 돌아오는 스승의 날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덕 볼게 없어서일까. 아님 스승이 덕을 못 베푼 것일까. 당신은 어느 쪽이십니까? 

작가의 이전글 [정영희의 장편소설]아프로디테의 숲2-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