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어떤 인터넷 게시판
게시글 # 2459
이런 사연을 올려도 되는지 정말 오래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올려봅니다. 신상보호를 위해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했습니다.
저는 현재 잠정적으로 전업 주부인 남자입니다. 작년 다니던 회사가 부도 나는 바람에 실직을 했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일을 하고 있었고 씀씀이를 줄이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실직급여도 있고 해서 구직생활을 하면서 견딜 만했습니다. 사실 아내의 월급이 저보다 더 많았거든요. 다행히 아내는 제 실직 후에 승진까지 해서 수입이 꽤 늘었고 아이들 돌봄 선생님 비용 절감하고 실직 급여 더하면 당장은 얼추 이전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제가 좀 알뜰한 구석이 있어서 둘이서 회사 생활하면서는 귀찮으면 매일 이것저것 시켜 먹고 툭하면 택시나 대리기사 부르고 하는 등 새나가는 지출이 줄어드니 그럭저럭 아끼며 사는 재미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백수생활이 길어질 줄은 몰랐지요. 맞벌이하느라 어린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했는데 이 참에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온전히 제가 케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어요. 아내도 어떤 면에서는 제가 전업 주부로서 집안일과 두 아이의 육아를 맡아주니 좀 더 회사생활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아하는 눈치도 있었고요.
물론 처음 몇 개월은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조금 괜찮다 싶은 회사는 면접을 보는 족족 떨어지고 정말 여러 조건이 최악인 회사들도 나이를 핑계로 저를 도매급으로 넘기려 했거든요. 사실 자존심이 많이 구겨졌고 점점 자신감도 잃어갔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대출금도 다 못 상환한 상태에서 경제적인 능력을 상실한 사십 대 초반 남자의 책임감과 자존감의 저울은 몇 시간이 멀다 하고 이리저리 널을 뛰었지요. 차라리 창업을 할까. 요즘은 1인 브랜딩으로 인터넷이나 sns 등을 통해 나름대로 고액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그런데 남들이 하는 건 그럴듯해 보이지만 막상 이런저런 아이템을 생각해 보면 누군가 다 하고 있고 과연 그런 것들이 수익이 날까 의심스러워졌습니다.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성공담들은 전부 과장된 포장처럼 보였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전업 주부라는 나름의 타이틀 뒤에 숨어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이 생활의 안락함에 중독되어 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준비를 하고 아내를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와 유치원을 보내놓고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끝내면 대충 11시 정도가 되는데 3 시즌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꿀 같은 자유시간이 생기 거든요. 처음에는 그때 취업정보도 알아보고 창업아이템도 구상해 보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냥 소설책 같은 걸 읽다가 산책도 했다가 하면서 정말 한량 같은 생활에 젖어가기 시작했어요. 또 3시 이후에도 아이들은 학원을 하나둘씩 더 다녔기 때문에 픽업을 해주고 나면 자투리 시간들이 남았어요. 물론 저녁 이후로는 또 퇴근한 아내를 케어하고 아이들 공부를 도와주거나 놀아주면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지만 말이에요. 사실 전업 주부란 게 생각보다 해야 할 일도 많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절대 필요한 위치라는 걸 스스로 세뇌시키면서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왠지 그런 생활이 7-8개월쯤 지나자 전 이대로 그냥 전업주부가 천성에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 즈음에 그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마주친 것은 둘째 아이 유치원 차량이 도착하는 아파트 입구 정차장에서였습니다. 7살 자리 아이들은 혼자서 유치원 차를 기다리는 친구들도 종종 있었지만. 6살인 제 아들은 아직 그러기에는 좀 어려서 늘 손잡고 기다리다 유치원 선생님에게 인계했었죠. 사실 처음엔 그 일도 정말 하기 싫었어요. 다들 엄마나 도우미 아주머니들 하고 나와 기다리는데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부스스한 머리를 모자로 푹 눌러쓴 아빠와 나오는 아이는 제 아들 녀석뿐이었거든요. 유치원마다 배차시간이 달라서 제 아들아이 유치원 차량이 올 때는 5명뿐이었어요. 아이들끼리 서로 알고 있으니 엄마들끼리는 꽤 친한 모양이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분들도 제게 말을 걸기가 뻘쭘했었던 거 같은데 몇 주 지나니까 서로 모른 척하는 게 더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서로 인사하고 아이들 이름도 외우게 되었죠. 그런데 한 서너 달 전 즘 새로운 멤버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녀였습니다.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유치원도 새로 옮겼던 것이죠. 분명 제 나이 또래로 보이긴 했는데 그녀는 단연코 저보다 어려 보이는 다른 엄마들 틈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어요. 늘씬한 키에 마치 발레나 무용을 하는 학생들처럼 작은 두상에 깔끔하고 단아하게 머리를 묶고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지요, 그 바쁜 아침시간에 그렇게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몸단장을 했다는 것은 매우 부지런하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무릎까지 흘러내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예사롭지 않게 균형 잡힌 자세는 금방이라도 점프해서 발레의 자세를 취할 것 같은 포스를 뿜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엄마들도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는 눈치였어요. 뭐 하지만 엄마들은 결국 아이들의 친화력에 굴복당하고 말죠. 엄마를 닮아서인지 인형처럼 동그란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그녀의 딸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야무진 얼굴로 이미 다른 아이들의 주목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도 집에서 그 아이 이야기를 한 모양이더라고요. 물론 우리 집 막내아들 녀석도 새로운 유치원 친구가 자기 반이 되었다고 은근한 관심을 표현했었지요.
그런데 3-4 일 즘 지날 때부터 그녀가 자꾸 내게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였습니다. 나의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눈이 몇 초 동안 마주친 적이 분명 너무나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자격지심에 아빠가 이 시간에 애들 유치원 배웅을 하는 것이 한심해 보였나 해서 일부러 아침 일찍 머리도 감고 면도도 깔끔하게 하고 운동복 대신 양복 슈트까진 아니더라도 데님에 단추가 달린 셔츠 정도는 입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며칠 그렇게 나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고는 금세 짐짓 모른 척 다른 엄마들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시작했죠. 다른 엄마들하고 말을 트기까지도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다가가 말을 걸기가 더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보내는 미소가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실 약간 설렌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냥 눈인사의 미소라고 보기에는 제 의문과 망상은 점점 쌓여가서 한 번쯤 말을 섞어봐야겠다는 기회를 보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멤버 중 3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가족 일정으로 유치원에 빠지게 된 날이 있었습니다. 정거장에는 나와 아들 그녀의 딸 그리고 도우미 아줌마와 그 집 아들 이렇게 6명만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고 도우미 아줌마는 우리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먼저 들어갔지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저는 이게 기회다 싶어 말을 걸었습니다.
“ 유진이가 정말 귀엽네요. 나이답지 않게 똘망하고”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요. 그런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또 미소를 짓더니 나를 또렷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나 정말 모르겠어?’ 하고 대뜸 반말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요. 전 너무 당황했습니다. 저는 순간 제 인생 전체를 통틀어 알고 있는 모든 여자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제 기억 속에 저장된 어떤 인물도 소환하지 못했습니다. 멍청하게도 저는 그녀가 제 초등학교 동창이란 사실을 그때에는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김영수. 맞지?" 그녀가 정확히 내 이름을 확신에 차서 또박또박 말하는데 그제야 언뜻 희미하게 어떤 소녀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이 떠오르진 않았습니다
"XX 초등학교! 우리 같은 반도 두 번이나 했었는데… 내 이름 기억 안 나는구나. 좀 섭섭한데. 하긴 거의 20년이 훌쩍 넘었으니까. 20년이 뭐야 30년은 돼 가나. 근데 난 너 첫눈에 보고 알아봤는데. 어쨌든 반가워."
전 멍하니 그녀의 말들을 듣기만 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죠.
"우리 차라도 마셔야 하는데 오늘은 바로 내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거든 내일 보자."
그리곤 다음 날까지 자기 이름을 알아오라 하고는 유치원 차량이 떠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향해갔습니다. 저는 하얀 원피스와 야구 모자 뒤로 내놓은 그녀의 머리 꽁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휙 돌아서 나를 보고 또 한 번 손을 흔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뭔가 들킨 사람처럼 저는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집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뒤적여보았습니다. 이름이 기억날 듯 말 듯했지만 도무지 혀끝에서 맺히지 않았습니다. 몇 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건지도 몰랐죠. 결국 10반까지 있는 초등학교 졸업 앨범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들춰보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추억을 훑는 시간은 흐뭇하기 마련이죠. 저는 잊고 있던 얼굴들을 하나둘씩 짚어가며 어린 시절의 시공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얼굴을 찾아냈습니다. 사실 쉽게 찾은 건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앨범 속의 그녀는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지금의 얼굴보다 훨씬 까무잡잡한 피부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안경테 너머의 이목구비에서 가까스로 그녀의 인상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녀와 저는 그렇게 사이가 가까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학급 반장도 할 만큼 똑 부러지고 똘똘했고 공부도 잘했지만 저는 야구부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별로 어울릴 일이 없었죠. 나름 우리 초등학교가 야구부로 유명했고 저는 최고의 에이스는 아니지만 투수와 1루수를 병행하며 주전선수로 활약을 하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제가 초등학교 때는 또래 애들에 비해 덩치도 크고 키도 훤칠해서 인물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서 학교 간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여자애들한테 꽃다발도 좀 받고 그랬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 인생의 황금기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제 기억에 그녀는 그렇게 인상에 남는 친구가 아니었어요. 좀 더 일찍 되바라지고 성숙해서 저한테 팬레터 같은 걸 보내오던 여자애들이 있었는데 그런 아이들이라면 모를까. 저한테 그녀는 그저 학급 반장이고 같은 동네에 살아서 가끔 등하교 때 같은 골목길을 걷게 된 정도였던 것 말고는 특별한 교차점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 깜장콩 같던 아이가 저렇게 우아한 여성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음 날 저는 약간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정류장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정류장에는 그녀의 딸인 유진이가 혼자 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색하게 아들 녀석 손을 잡고 유진이 옆에 세우면서 인사하는 척 말을 건넸습니다. 유진이 오늘 혼자 나왔어? 하고 물었습니다. "네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 그래 대단한데. 근데 엄마는 오늘 안 나오시나"
" 엄마 아파서 누워 있어요. 감기 걸렸대요, 유진이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 사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많이 서운했어요. 반갑게 서로 이름 부르면서 작은 동창회를 할 수 도 있었는데. 기껏 이름도 알아왔는데 하필 오늘 감기에 걸린 걸까.
그날 이상하게 집안일이 손에 안 잡히는 겁니다. 접시도 하나 깨 먹지 않나 음식물 쓰레기통을 엎지 않나. 냉장고가 텅 비어있는 바람에 머리나 식힐 겸 아파트 단지 옆에 있는 대형 할인 마트로 장이나 보러 가야겠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마트에서 누굴 만났는지 아십니까. 아파서 딸아이 유치원 배웅도 못한다던 그녀가 버젓이 카트를 끌고 물건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화장까지 짙게 하고는 말이죠. 저도 모르는 사이 저는 벌써 그녀 앞에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이수진!" 그녀가 당황한 듯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아프다면서 괜찮아"
"음 그냥 좀, 근데 장 보러 온 거야?"
어쩐지 매일 아침 정류장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뭔가 언짢은 듯 한 표정이었습니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나를 마주친 것이 좀 불편한 듯한 기색이었습니다.
"내가 어제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다 뒤져 봤다니까. 너 수진이 맞지 5학년때 우리 반 반장! "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떨면서 어색함을 떨쳐내려 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빙고 하면서 그때까지 한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카트에 살짝 던지든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내일 아침에 또 보자 하고 그냥 가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상황은 초등학교 때 반장을 하면서 은근히 친구들에게 하대하듯 명령 같은 말투로 뭔가 지시를 하고는 얄밉게 사라져 버리던 그 모습을 그대로 떠올렸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아니 그 순간 그녀가 그랬었다는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뭔가 잔밉고 얌통스럽다는 느낌? 그날 집에 와서 냉장고에 장 봐온 물건들을 집어놓는데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 식재료들은 왜 사 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정류장에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저를 데면데면 대했습니다. 저도 그냥 여느 학부모들을 대하듯 눈인사만 하고 애들을 보내고는 우리 동 쪽으로 걸어 들어왔죠. 우리 동 입구 쪽으로 돌아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저를 불렀습니다. 수진이였습니다. 그녀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냥 들어가게? 우리 차라도 한잔 해야지"
그러고는 주변을 잠깐 살피고는 말했다
" 음 단지 안에선 그렇고 단지 옆에 마카롱이란 카페 있지? 거기서 1시간 후에 보자. 집에 가서 좀 옷 좀 갈아입고 올게” 그녀는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뭐야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하면서 저는 집에 가자마자 샤워를 하고 몇 개 안 되는 외출복을 번갈아 입어 보았습니다.
카페에서 마주하고 있는 처음 몇 분 은 좀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동창들에겐 공유된 기억들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곤 하지요. 초등학교 선생님들 이야기부터 서로 알고 있던 친구들 이야기 그리고 제가 속했던 야구부의 전국대회 결승 진출 이야기까지 끊길 듯 이어지는 추억의 화제들이 한 시간이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과거의 이야기가 끊기면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같은 학부모로서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아침 정류장에서는 그저 형식적인 학부모로 인사를 하곤 점심시간 전후로 함께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장을 보는 등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실직 중인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꺼려지긴 했지만 막상 그녀는 제 이야기를 듣고 안타깝다는 듯이 위로도 해주고 좋은 직장을 또 구할 거라는 덕담도 아끼지 않아 왠지 힘이 되었습니다. 만남이 반복되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먼저 그녀가 제 아내에 대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만났는지 성격은 어떤지 등등 약간은 집요하다 할 만큼 이것저것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성심성의껏 우리 부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너무 푼수 같았을까요. 그러면서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직 후에 최근에는 아내가 저를 너무 밥풀떼기 취급하는 것 같다고 농담처럼 약간 불쌍한 척 같은 걸 했거든요. 사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왠지 요즘 아내가 저를 좀 한심하게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좀 서운했던 말들이 새록새록 기억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왠지 자기 연민에 빠진 남자로 보이기 싫어서 화제를 그녀의 남편이야기로 옮겨갔죠. 신기하게도 그녀의 남편 직업은 아내와 같은 회계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저 너무 바빠서 늘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없다고 특히나 연말 연초 에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푸념을 했죠. 저도 그 직업군의 바쁜 시기의 패턴을 알기에 크게 공감하는 시늉만 했을 뿐 어쩐지 남편의 이야기에 그늘진 모습 때문에 더 이상 묻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 왠지 초등학교 때보다 우리는 더 친근한 사이가 된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남사친 여사친이 생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던가요. 어느 순간 그녀가 오늘은 일이 있어 장을 같이 보기 어렵다고 하거나 아침에 유진이가 유치원 결석을 하게 되는 날이면 왠지 모르게 기운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저와 친근하게 지내다가도 주기적으로 어느 날은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저를 피하는 듯한 느낌을 줄 때도 있고 일주일 정도는 여러 가지 일정을 핑계로 안 나타나다가 또 어떤 날은 갑자기 제 앞에서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면서 또 저한테 이런저런 관심을 드러내며 이것저것 묻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밀당이랄까. 왠지 그 호흡에 뭔가 말려들고 있는 느낌도 들었어요. 계속해서 제게 친절하고 상냥했다면 전 그냥 초등학교 동창정도로 생각했을지 몰라요. 근데 그 차가움과 따뜻함의 낙차 때문인지 전 자꾸 그녀에게 뭔가 끌려 다니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우리에게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점점 저는 양가의 감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만나면 그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즐겁기도 하고 약간의 긴장감도 들어 뭔가 내안에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밤늦게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아내를 보면 왠지 측은하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하나요. 마치 아내 몰래 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아내가 오늘은 뭐 했어라고 지나가는 말로 물으면 가슴이 콩닥거렸지요. 더구나 저는 지금 가장 노릇도 못하는 주제이니 어떤 때는 스스로가 정말 한없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부터 아내는 은근히 제게 직장을 다시 안 구할 거냐고 슬슬 압력을 주기 시작했거든요. 어느 날인가 밤늦게 회식자리를 마치고 술에 취해 귀가한 아내는 뜬금없이 당신이 우리 가족 지켜야지 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구직을 해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그동안 전업주부 코스프레를 하면서 아내에게만 일방적으로 경제적 부담을 전가하고 저는 달콤한 추억놀음에 빠져 있었구나 하는 자책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정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고 여기저기 원서를 넣어보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론 사실 초등학교 동창 그녀와 자주 만나는 것이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제 감정이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기에 이 참에 취업준비를 구실로 그녀와 거리를 두어보려 했지요. 그렇게 며칠 정도 유치원 차량 앞에서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연락을 해와도 구직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었어요. 마침 아내는 회사에서 지방에 워크숍을 가고 없었지요. 아내는 주말에 워크숍을 가는 게 미안하다고 금요일 저녁부터 친정에 아이들을 맡겨놓기까지 해서 저는 오랜만에 혼자 주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와이프도 친정에서 바로 워크숍을 간다고 해서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자다가 전화기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바로 이수진 그녀였습니다. 주말에는 서로 연락을 안 한다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아무래도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다 보니 아무리 초등학교 동창이고 이웃이라 해도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저는 한 번도 주말에는 연락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물론 그녀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그런지 가슴이 더 뛰었습니다.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그녀가 뭔가 다급한 소리로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며 나와 줄 수 있냐고 다짜고짜 묻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뭔가 격앙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급히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차에 타자 마자 무슨 일이냐는 제 질문에는 대꾸도 않고 그녀는 차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웠지만 입을 꾹 다물고 전방 만을 주시한 채 묵묵히 운전만 하는 그녀의 침묵의 기운을 깰 수가 없어 그냥 가만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강화도로 향하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이 없게도 뭔가 올 것이 온 것인가라고 두려움 반 기대반으로 이 이상한 나들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섬의 입구에서부터 차량이 눈에 띄게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줄어드는 자동차의 속도에 비례하여 그녀의 짜증 섞인 한숨소리가 커져갔습니다. 강화대교를 건너 섬으로 진입하면서 잠깐 차간 거리가 생겨나자 그녀는 무섭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앞차가 신호에 걸리며 급정거를 했고 우리가 타고 있던 차는 끼익 소리를 내며 거의 앞차와 충돌직전에 멈춰 섰습니다. 그녀는 운전대에 얼굴을 박고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어깨를 들썩이더니 나지막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저는 안 되겠다 싶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독이면서 제가 운전을 하겠다고 잠시 쉬라고 했지요. 신호가 바뀌자 차들이 클락숀을 울리며 위협했습니다. 그녀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잠깐 휴지로 눈물을 닦고는 제게 자리를 양보하고 조수석에 순순히 앉았습니다. 어디로 갈지 묻는 내게 그녀는 그냥 아무 곳이나 조용한 곳으로 가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무작정 작은 지방도로로 빠져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 공터에 차를 세웠습니다. 나는 차를 몰고 오다 보아 두었던 작은 구멍가게에서 캔커피 두 개를 사 와 그녀에게 건네곤 나란히 앞 좌석에 앉아 조수가 빠져나가 휑하니 드러난 갯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 놀랬지. 미안해”
"괜찮아 근데 무슨 일이야 그리고 나랑 같이 갈 곳이 있다며 강화도엔 왜 온 거야?"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들이 내쉬며 말했습니다,
“ 그냥, 주말이라 좀 바람 쐬고 싶었어”
“ 남편하고 유진이는?”.
“유진이는 이모집에 좀 맡겼고. 남편은 회사일로 출장 중이야” 그리고는 좀 목소리 톤을 바꾸어 내게 물었다
“ 넌? 넌 주말인데 집에 뭐라고 하고 나온 거야”.
‘" 어 사실은 나도 오늘 혼자 있어. 와이프랑 애들이 친정에 놀러 갔거든”. 왠지 아내를 주말에도 일 시키러 보낸다는 인상을 주기는 싫어 조금 거짓말을 보탰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상하게 그 표정에서 제 거짓말이 들통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 잘 됐네 , 둘 다 자유니까 우리 여기 드라이브나 하다 갈까. ” 그러면서 차문을 열고 나가더니 바다를 바라보며 크게 기지개를 폈습니다. 그 바람에 입고 있던 짧은 티가 살짝 올라가며 군살이 하나도 없는 하얀 그녀의 허리가 잠시 드러났습니다. 돌아선 그녀가 운전석 문으로 다가와 내리라는 시늉을 하며 허리를 살짝 굽힐 때는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내가 운전해도 괜찮다는 말에 그녀는 너 보험처리 안된다며 내 팔을 붙잡고 운전석에서 나를 끌어내다시피 하는 바람에 그녀의 긴 손톱에 살짝 긁히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좀 생기가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감정기복이 여전히 좀 신경 쓰였지만 그리고 저를 거기에 데려온 진짜 이유가 너무 궁금했지만 그냥 그녀의 소풍에 조연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강화도 해변도로를 거의 한반퀴 도는 동안 그녀는 다시 입을 꾹 다문채 운전만을 했습니다. 가끔 비트 강한 노래를 틀었다 조용한 노래를 틀었다. 내 마음만큼이나 들썩이는 변죽스런 선곡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어느 해안에 새로 지어진 것 같은 작은 모텔로 갑자기 핸들을 꺾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좀 쉬다 갈까" 그녀는 핸들을 꼭 잡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뭘 잘 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다시 말했습니다.
" 나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 왜 나 매력 없어? "
저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모텔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말했습니다.
"야 그만하면 많이 놀랬다. 오늘 나 놀래킬려고 작정하고 나왔냐. 집에 뭔 일 있어. 남편하고 싸웠어?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냐"
나는 애써 그녀의 말을 농담처럼 받아넘기는 시늉을 했습니다.
" 너 솔직히 나랑 자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계속 나랑 만나고 그랬던 거 아니야? 너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거 아냐?"
그녀는 제 브레이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도를 더 세게 받아쳤습니다. 물론 제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어떤 욕망이 그녀를 향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갑자기 원색적인 표현을 하고 나오니까 기분이 좀 언쨚았습니다.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저는 그저 소설 소나기 버전 정도의 설렘을 즐기고 있었던 건데 갑자기 사랑과 전쟁의 한 가해자로 저를 몰아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 나는 말이야 수진아… 너 만나서 좀 반갑고 새로운 친구가 생긴 거 같아 설레고 뭐 그랬던 것 사실이야 근데..”.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짧은 욕설은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 것 같습니다.
“ 씨발, 병신” 그리고는 놀라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제게 갑자기 지갑 가지고 왔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그녀는 제게 '잠깐 차에서 내려볼래' 라며 자동 잠김된 도어록을 풀었습니다. 그녀의 어조가 너무 강해서 저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를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내리자 그녀는 바로 차를 몰고 모텔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너무 어의가 없어서 그녀의 차를 쫓아 달려갈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한 동안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결국 대중교통을 타고 혼자 집에 귀가했습니다,
그 이후로 며칠이 지나고 있습니다. 유치원 차량 정류장에도 그녀는 딸 아이만을 내보낸 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화나 문자도 없었습니다. 제가 뭘 잘 못 한 걸까요. 혹시 그녀 역시 저에게 어떤 마음이 있었는데 제가 그 마음을 잘못 읽은 걸까요. 아니면 제가 그녀에게 마음을 들킬 만한 행동들을 해서 그녀 입장에서는 불쾌했던 걸까요. 아님 모텔에 그냥 갔어야 했을까요. 어쩌면 잘 된 일일까요. 이대로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는 게 맞는 걸까요. 도무지 마음이 복잡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저를 어떤 마음으로 만났을까요. 그리고 지금 그녀는 제게 무얼 원하는 걸까요. 저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까요
게시글 # 3014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저희 가족은 남편 회사와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했습니다. 10여 년을 아무 불만 없이 출퇴근하던 남편이 갑자기 회사가 너무 멀다며 자가인 아파트를 전세 주고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간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그것도 원래 살던 아파트에 비하면 평수도 좀 작고 더 오래된 아파트로 옮겨간다는 게 좀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편이 힘들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파트에 내연녀가 살고 있었던 겁니다. 처음 몇 달은 이사한 집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차키를 잃어버렸다고 한참 찾다가 결국 스페어 키로 출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방송실에서 차키를 보관하고 있으니 분실한 세대는 찾아가라는 방송이 나왔는데 차종이 남편의 차와 같았습니다. 경비실에 가서 확인해 보니 남편의 것이 맞았는데 이상한 것은 차키를 발견했다는 장소가 우리 동과는 정 반대편 주차장이었습니다. 그전 날 남편이 늦게 들어오긴 했지만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주차를 할 만큼 주차장 여유가 없는 경우는 별로 없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역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저녁에 차키를 넘겨주며 남편에게 말하면서 왜 거기까지 가서 주차를 했냐고 하니 그런 일 없다고 발뺌을 하더라고요. 그쪽에 주차를 하지 않았다면 굳이 거기서 분실물이 습득될 일이 없잖아요. 사실 그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어요. 저도 늦깎이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었고 공부와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이사한 후로 집에 늦는 일이 많아졌어요. 회사도 가까워졌는데 일이 많다고 하면서 평일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가끔 회사업무로 출근하는 일도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교통 위반고지서가 집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위반 장소와 날짜가 수상했습니다. 분명 회사에 간다고 했던 토요일 어느 날이었는데 장소가 양평의 어느 도로였거든요. 동승자 쪽은 사진에 가려져 있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때부터 의심과 불신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지서의 벌금을 입금하고 없던 일처럼 숨겼습니다. 생각해 보니 최근 우리 부부는 부부관계는 둘째치고 이렇다 할 대화 같은 것도 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아이를 재워놓고는 밤에 공부를 해야 했고 그러다 따로 잠드는 적도 많았거든요.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 나타났죠.
저는 남편이 잠든 사이 그의 핸드폰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저희 부부는 서로의 사생활에 잘 간섭하는 편이 아니었고 한 번도 서로의 핸드폰을 본 적도 없고 서로 그런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비밀 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죠. 저는 통화 내역이나 메시지를 찾아봤어요. 메시지는 깨끗했습니다. 그런데 통화목록에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윤 과장이란 이름이 거슬렸어요. 그 이름으로 된 메시지를 찾아봐도 대부분 업무 관련된 것이었지만 어쩐지 제 육감에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윤 과장이란 사람의 전화번호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회사에서 늦는다고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9시쯤 아이를 일찍 재우고 그 윤 과장이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받지 않았지만 두 번째 전화에는 응답을 하더군요. 여보세요 하는 여자의 음성에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엉뚱한 이름을 대면서 찾았죠. 여자는 아주 냉정하게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하고는 끊으려 하는데 익숙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 뭔데 잘못 걸려온 전화야? 받지 말라니까” 그것은 바로 제 남편의 목소리였어요. 그리고 또 30분쯤 있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는데 집에 거의 다 왔다며 피곤하면 먼저 자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혼자 잠든 아이를 남겨두고 나와 지하 주차장입구가 보이는 기둥 뒤에서 남편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남편의 차가 들어왔는데 바로 우리 동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 105동 쪽으로 차를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멈춰 섰고 조수석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내렸습니다. 조수석에서 내린 여자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빠른 걸음으로 곧장 105동 입구로 들어갔습니다. 남편이 차를 다시 돌려 우리 동 앞에 주차하고 건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저는 풀썩 주저앉아 숨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애를 혼자 재워두고 어딜 갔냐며 화를 내는 데 정말 소리 지르고 싶은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쓰레기 버리고 올라가는 중이라 둘러댔습니다.
그날 받은 충격과 배신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요. 저는 우리 부부의 관계가 나빴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비록 제가 공부를 핑계로 남편과의 관계를 별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좀 예민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트러블이 있었던 게 아니라서 전 배신감을 넘어서 허탈함과 의문만이 가득했습니다.
이후 그 내연녀의 정체를 알아내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같은 아파트 105동에 살고 있었고 사실대로 남편의 회사 동료였습니다. 몇 번의 잠복과 추적 끝에 그녀가 사는 집 호수도 알아냈고 아이가 둘 있는 유부녀였고 최근 남편이 실직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 남편이 바로 제 초등학교 동창이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사실 처음엔 저도 잘 못 알아봤어요. 멀리서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걸 본 거라서 얼굴을 잘 보지는 못했거든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제 딸아이의 유치원을 그 집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나를 속인 그들에 대한 복수는 내가 그들을 속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들을 천천히 압박해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제 초등학교 동창인 그녀의 남편이었던 거죠. 처음 유치원을 옮기고 아이를 배웅하는 아파트 내 정거장에서 그 친구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도대체 어떤 위인이길래 아내 관수를 이따위로 했는지 그 낯짝을 살펴보고 싶었죠. 그런데 왠지 낯설지가 않은 거예요. 나이가 들어서 변하긴 했어도 초등학교 때 모습이 꽤 많이 남아 있었죠. 사실 그 친구는 잘 몰랐지만 초등학교 때 잠시 제가 그를 좋아했었거든요. 물론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그는 당시 학교 야구부 선수였는데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편이어서 여자 아이들한테 인기가 좀 있었지요. 게다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 친구는 전혀 기억을 못 하지만 실은 유치원도 잠깐 같이 다녔었거든요. 제 성격 하고는 달리 털털하고 친구들하고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그가 좀 부럽기도 하고 사실 사춘기가 좀 일찍 와서 저 자신의 모든 면이 마음에 안 들던 시기라 늘 웃고 여유 있어 보이는 그가 자꾸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닌 초등학교 야구부가 전국대회 우승 준우승도 몇 번 할 정도 유명했어서 단체로 경기에 응원을 나가는 일들도 많았는데 한 번은 제가 앉은자리로 그가 친 파울볼이 넘어와 제가 그 공을 줍게 되었어요. 그땐 그런 우연들도 뭔가 의미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시절이라 한동안 속앓이를 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파울볼은 어쩐지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복선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뭐 그리 심각한 건 아니었어요. 별 다른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잊혀졌는지도 모르게 금세 그런 감정은 사그라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일로 엮이니까 초등학교 때 그저 잠시 설렜던 기억마저도 다 흑역사로만 느껴지더군요. 혹시 날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했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친구는 좀 둔한데도 있고 눈치 없기로는 정말 최고더군요. 어쩌면 지 마누라가 바람난 것도 모르는 게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초등학교 시절 그렇게 털털해 보인 것도 어쩜 저런 둔함과 눈치 없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아무튼 첫 마주침 이후 며칠 지켜보니까 그 친구는 직장을 다니지 않는 눈치였어요. 처음 하루 이틀 좀 경계를 했지만 오히려 뭔가 이 상황을 전부 알고 있는 건 저뿐이란 생각이 들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 친구와 초등학교 동창인 것을 핑계로 두 커플이 함께 식사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든지 하면 그때 둘은 어떤 압박감을 느낄까 혹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 물끄러미 쳐다보며 너를 알고 있다는 눈치를 줘도 그 녀석은 절 전혀 모르는 눈치더라고요. 할 수 없이 제가 먼저 커밍아웃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길 그래도 좋아해 준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괘씸해서 다음 날까지 이름을 알아오라는 미션을 주기는 했죠. 그런데 그날 밤도 남편은 늦게 들어왔습니다. 저는 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어요. 그다음 날 아침 그 친구를 마주쳤다가는 당장이라도 네 아내가 내 남편과 바람이 났다고 큰 소리로 외칠 것 만 같아서 아이를 혼자 내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 그를 딱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그 역시도 피해자일 뿐인데 저는 그 순간 그가 마치 우리 가정을 파괴한 주범이나 되는 것처럼 몹시 밉게 느껴졌어요. 눈치 없이 한껏 반가운 기색으로 저를 대하는 그를 계속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혹시나 그를 만나면 모든 사실을 그냥 쉽게 털어놓게 될까 봐 좀 제 자신에 대한 점검이 필요했습니다.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처음 계획대로 그와 친분을 쌓고 넷이서 함께 마주하는 순간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자주 만나 차도 마시고 점심식사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부분은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와 그 시절 친구들이나 선생님 이야기였죠. 저도 너무 직접적으로 그 친구의 와이프 이야기를 물어보기엔 좀 성급하다 생각했어요. 서로 공유된 기억 같은 걸 나누다 보면 마치 그 사이의 빈 시간들이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도 있긴 하죠. 뭐 옛날 이야기 하다 보면 지금의 이런 상황들이 잠시 잊혀지기도하고 또 그러다가도 그런 철없던 시절의 풋풋함과 대조적으로 더 비참하고 괴롭기도 했죠. 화제가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살아온 이야기들로 이어지고 어떻게 결혼했는지 서로의 배우자 이야기를 하게 될 거 라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어요. 도대체 남편은 어떤 이유에서 그 여자에게 끌리게 되었을까. 솔직히 전 이해가 잘 안 되었어요. 사실 저보다 몇 살 어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녀의 외모에 뒤진다고 생각진 않았거든요. 물론 남자들에겐 그냥 새로운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통속적인 이야기도 있긴 하죠. 또 초등학교 동창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애교가 많다던지 하는 성격도 아닌 거 같아요. 사실 집안에서 애교 담당은 자기라나 뭐라나. 수다와 푼수와 눈치 없음이 애교와 동일어라면 어느 정도 맞는 거 같긴 하네요. 얼마 전 실직을 했다고 하는 친구는 6개월 정도 전업주부 생활을 하면서 온통 여성호르몬이 범벅된 것처럼 보였어요. 좋게 이야기하면 세심한 배려도 있고 감성적인 공감능력도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남성적인 매력이 퇴화되어 있는 전형적인 아줌마랄까. 어릴 때는 또래에 비해 키고 크고 덩치도 좋았었는데 어쩐지 지금의 그의 모습은 성장호르몬이 일찍 멈춰버린 것처럼 왜소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그의 아내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순진한 친구가 또 미워졌습니다.
게다가 몇 번 만나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상한 방향의 기류가 점점 형성되어감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의 직감이 맞다면 그 친구는 제게 이성적인 호감을 비치고 있었습니다. 부부동반으로 식사나 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그는 난색을 취했습니다. 뭐든 감춘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이죠. 그럴 때마다 저는 그의 머리통을 한번 쥐어박고 정신 차려 이 녀석아 네가 이 모양이니까 와이프가 바람이 나지. 취직을 하던지 네 집안 단속 좀 잘해서 서로의 가정을 지켜야 될 거 아니야 하고 윽박을 지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은 그를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장이라도 증거를 수집해서 빨리 두 인간을 응징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그를 멀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남편의 얼굴을 보면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가도 이혼이란 막연한 절차와 이후를 생각하면 두려워졌습니다. 출산 후 경력 단절녀가 된 지 거의 10년 가까운 시간의 공백을 메꾸고 아이를 혼자 키울 만큼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을지도 두려웠습니다. 사실은 마음속 한편에는 그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면 스스로 이 소란을 진정시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기대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 관계를 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남편이 먼저 이혼을 하자고 할까 봐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약해지고 혼란스러워지고 이런 상황에서 혼자 독립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제가 미워 자존감이 바닥을 쳤습니다. 그럴 때면 그 친구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건 그를 그의 아내와 동일시함으로써 복수를 하고자 하는 제 마음을 단단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가 저를 대하는 약간의 연애 감정 같은 태도에서 저의 무너진 자존감을 위로받으려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자꾸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같은 피해자로서의 연대 의식이랄까 그런 것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친구의 모습에 대한 연민은 바로 제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죠. 그러다가 이런 게 시작이 아닐까. 남편도, 그 친구의 아내도. 갑자기 부처라도 된 듯 너그러워지는 마음이 들 때면 모질지 못 한 제 스스로가 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남편은 또다시 회사에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많아 출근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거짓말인 줄 알았지만 또 그냥 그를 보내주었습니다. 사실 그전에 저는 남편의 핸드폰에 위치 추적기를 몰래 설치해 두었었거든요. 남편은 회사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듯하더니 멈춰 섰다 다시 회사 방향을 지나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김포 쪽으로 가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강화도가 목적지인 듯했습니다. 잠시 이성을 잃었던 저는 초등학교 동창 녀석을 대동해서 그들의 밀애 현장을 함께 급습하고 싶어 졌습니다. 다짜고짜 그 친구를 불러서 차에 태우고는 강화도로 차를 몰았습니다. 용의 주도한 복수고 심리적인 압박이고 뭐고 이제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냥 이 관계와 상황을 폭로하고 종결시키자. 저는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꼭 쥐고 돌진하는 병사처럼 엑셀에 힘을 주었습니다. 서울 외곽을 벗어나자 주말이어서인지 강화도 부근 진입부터 차츰 차가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앞차량의 꽁무니를 응시하며 따라가다 슬쩍 옆에 앉은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작은 경차 안이라서 그런지 그의 표정에 서린 긴장한 근육들이 왠지 더 잘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신경이 옆자리로 이동하자 이따금씩 꼴깍거리는 그의 침 삼키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렸습니다. 문득 이 상황을 눈치 없는 친구 녀석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혹시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분노와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의 어색한 공기가 버무려져 교통체증처럼 체기가 올라왔습니다. 강화도 읍내로 진입하는 잠시 동안 정체가 풀리는 듯해서 저는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습니다. 그러다 신호에 걸린 앞차를 거의 추돌할 뻔하고서야 좀 정신을 차렸습니다. 제가 걱정되었는지 그 친구가 운전을 하겠다고 해서 그러 마하고 잠시 마음을 추스렸다 다시 생각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어촌 자락에 차를 세운 그가 음료수를 사온다고 다녀오는 동안 저는 핸드폰 어플에 연결된 남편의 차량 위치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10여킬로 떨어진 어는 해안가의 좌표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잠시 진정했던 마음이 다시 부글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돌아오기 전 얼른 핸드폰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해 두었습니다. 그가 사 온 커피를 조금 마시고 있는데 그제야 녀석은 여기에 자기를 데려온 이유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사정은 까맣게 모르는 친구의 질문은 왠지 질문이 아니라 기대처럼 느껴지는 말투였습니다. 저는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었다고 둘러대고 목적지를 향해 차를 몰았습니다. 네비가 가리키는 목적지에는 지어진 지 얼마 안 되는 모텔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저 건물 어딘가에 두 남녀가 뒤섞여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2시밖에 안되었는데 모텔방이라니. 차라리 근사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거나 멋진 풍경의 바닷가를 걷고 있다면 덜 불결한 느낌이었을까요. 저는 친구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나랑 잘래라고 했던가 아무튼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었어요. 왠지 아무것도 모르는 놈에게 사건 현장을 맡겨두고 현실을 바라보라는 벌을 주고 싶었습니다. 눈치도 없이 우정이니 설렘이니 뭐 그런 말들을 주저리며 내 급발진을 마치 보호해 주는 척 주접을 떠는 녀석에게 짧은 욕을 해대고는 저는 그를 차에서 내리라고 하고 그길로 곧장 서울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는 거기서 그 두 사람을 보게 되었을까요. 아마 제 급작스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남편은 그 뒤로 별다른 변화의 기색이 없었으니까요. 눈치도 없는 녀석은 내 욕을 해대며 그냥 대중교통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겠죠.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는 제 손에 때를 묻히고 싶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가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 친구를 통해 이 사건을 마무리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품위가 떨어지는 걸 바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남편의 뒤를 캔 것도 모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먼저 발각이 되어 모든 추한 싸움들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 두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두 년 놈의 사이가 벌어지면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오로지 가련하고 비련한 피해자의 모습으로 남편을 쿨하게 용서해 주고 그 댓가로 그를 평생 옆에 두고 괴롭히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껄떡대는 그 친구를 빌미로 모든 책임을 유유상종이라고 유전자가 불순한 그 집 커플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왜 제가 이렇게 쩔쩔매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또 왜 죄 없는 그 친구에게 애먼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걸까요 . 죄를 지은 건 저들인데 왜 제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야 하는 건가요. 그냥 여기서 다 까발리고 끝내버릴까요. 사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하챦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남편은 굳이 왜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온 걸까요. 오히려 불륜이 탄로 날 가능성이 더 높을텐데. 설마 그걸 노린 걸까요. 그 아슬아슬한 스릴감을 느끼고 싶어서였을까요. 애초에 불륜에 사랑이 있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그 스릴감에 점점 빠져들었던 게 아닐까요. 그리고 점점 더 강한 강도를 원해서 한 아파트로 이사한 게 아닐까요. 아파트라는 그 가까운 듯 멀고 멀고도 가까운 이웃의 관계 속에서 그런 두근거리고 쫄깃한 일탈을 즐긴 것은 아닐까요. 혹시 두 사람은 이미 우리가 서로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것도 그래서 가까이 지낸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는게 아닐까요. 그래야 더 스릴을 느낄 테니. 이런, 제가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네요.
이제 앞으로 어떡해 해야 할까요. 정말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제가 구역질 나게 싫어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