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는 우연히 통화에서 얼마 전 총동창회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교 총동창회? 아니 무슨 공지 연락도 없이 지들끼리 하는데 무슨 동창회라고. 참여하고 안 하고를 떠나 불쾌한 일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영채가 연결해 줘서 어찌어찌하여 기수별 밴드(네이버 커뮤니티)에 초대를 받았지만, 초대를 받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굳이 이제 와서 왜 밴드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영지는 철옹성 같은 자신의 바운더리 밖을 나갈 생각이 없다. 영채는 통화에서 한 번쯤 동창회는 가볼 수는 있을 것 같다고 했지만 영지는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변수 없이 안정된 울타리를 지켜내는 게 더 중요하니까.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는 게 싫은 그녀였다. 그녀는 이제 와서 새로운 사람도 아닌 중고 같은 동창들을 만나 시간을 이어 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걸 시작한다는 거 자체가 즐겁지 않았다.
영채는 영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카톡으로 토요일 새벽에 보내놓고 잠이 들었다.
영지와 영채는 자사고 동창이었다. 그 둘은 소위 우열반이라고 하는 학교 규정상 1-1반에 배치되어 같은 반이 되었고, 엄밀히 반석차가 전교석차가 되는 첫 시도에 입학한 케이스였다. 영지는 3~4 등수 사이. 영채는 9~11등 사이 정도. 더구나 영채는 공부 외에 다른 것에도 딴청을 많이 피워서 성적이 들쭉날쭉 하였다. 또한 둘은 초등학교, 중학교도 동창이었지만 공감대도 친분도 별로 없었다. 너무나 서로 다른 세계에 있었다.
영지는 항상 상위권으로 입시에 집중했지만 영채는 딱히 그래 보이지도 않았기에 선생님도 친구들도 그녀를 미스터리하게 생각했다. 왜냐면 영채가 놀기만 하는 것 같은 것에 비하면 성적이 높게 나와서 불러다 혼내고 싶어도 혼낼 수 없는 불가침 같은 영역이 있었다. 그것이 영채의 매력이기도 했다. 뭔가 성가시게 주목받고 있는 애였다. 반장부반장은 못해도 미화부장, 생활부장, 오락부장은 하는 아이. 그것도 자기가 하겠다가 아니라 선생님들이 굳이 영채를 시켰다. 그래서 영채를 싫어하는 애들도 많았고, 좋아하는 애들도 많았고, 신기하게 바라보는 애들도 많았고, 영지처럼 아예 관심을 안 가지는 친구도 있었다.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 바운더리가 달랐다. 영지는 전교 1등 그룹애들과만 어울렸으니까 사실 영채와 어울릴 필요를 못 느꼈다. 알게 되는 게 성가실 수 있었다. 그토록 현실적인 영지였다.
영지는 육군 소령 여군장교였고 공무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 1등 공부 1등. 운동과 공부 모두 뛰어났고, 빠른 진급을 달았다는 것도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이 둘을 낳고는 베이비시터의 문제로 애들을 떨어뜨려놓고 지방훈련을 계속 다닐 수 없어 결국 사표를 쓰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간 소식으로는 준공무원 같은 직장에서 군 관련 일을 계속해왔다고 한다. 워킹맘으로 대단히 잘 해내고 있었다. 영채는 그런 영지와 최근에 자주 연락을 하였고, 자기 영역이 확고하여 중심을 잡고 있기에 둘은 어쩌면 통하는 면이 있었다.
둘의 소통은 영채의 시도였다는 것은 다분했다. 영지는 굳이 영채가 연락하는 것을 막을 이유도 없었다.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 친구도 아니었고, 영채는 사리분별은 있어서 디테일하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애였다. 주변에서 얼쩡대더라도 특히 성가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일상의 부스러기를 나눠주는 거야 머 어렵겠는가 말이다.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영채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놓고 토요일 주말 늦잠을 잤다. 오전 11시 30분 점심때 즈음, 이불속에서 알림을 받고 핸드폰을 찾았다. 영지가 보내온 남산 타워, 노랗게 물든 여러 장의 가을 남산타워 사진이었다.
혼자 갔다고 한다. 남편과 애들을 두고서. 굳이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하여 혹시라도 영채가 오해할 무언가를 자체 검열하는 것 같았지만 영채는 신경쓰지 않았다. 요즘 흔한 이혼현실에 한 커플 더 탄생한다고 놀랄 일도 아니고, 영지는 직장도 준공무원인 커리어 우먼이라 염려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게 맞다. 혼자 가던 남편과 같이 가던 솔로인 영채가 상관할바도 아니었다.
모처럼 주말에 늦잠을 자고 있었기에 그저 밖의 날씨가 좋겠구나~ 정도였다. 노란 은행잎의 남산은 서울에 사는 영채도 안가본 곳이라 신기할 뿐이었다. 영지에게 답장을 했다.
"너 남산이니? 너 서울 왔어? "
"응. 혼자 왔어. 가을 느끼러. 남편은 애들 학원 태워주고 나만 왔어."
"멋지다~. 가을을 느끼러 성남에서 남산까지 오다니. 서울에 사는 나도 가을 보러 남산 안 가는데...ㅎㅎ 역시 대위님이야~"
이불을 끌어당긴다. 이불의 감촉이 너무 좋다. 보들보들하게 뺨을 비벼본다.
" 나 부르지~~ "
" 그냥 혼자 왔어~"
" 지금이라도 나갈까? 우리 보려면 뻘쭘하려나? ㅎㅎㅎ 얼굴에 보톡스 맞기 전엔 못 만나겠지? "
" 담에 같이 보자~. 오늘은 혼자 왔어."
그 '혼자 왔어'라는 말이 그토록 영지에겐 낯선 단어인가? 영채는 혼자가 아닌 게 이상한 솔로생활 같은데 자꾸만 ‘혼자 왔어'라는 말을 영지는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걸까 싶었다. 혼자 하는 게 머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는데 남산에 가을구경 온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치 '혼자 왔어'에 밑줄이라도 그어야 할 판이라고 생각했다.
‘영지에겐 그게 더 중요했었을까?’ 싶은 영채다. 또한 남산을 자차도 아닌 지하철 타고 걸어서 갔다니 대단한 발상과 의지라서 영지의 다른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몰랐던 감성적인 면이었다. 영채는 전화를 끊고 점심도 안 먹고 밀린 잠을 다시 잤다.
오후에 일어난 영채는 대충 짐을 챙겨 카페로 갔다.
따사로운 햇살에도 커피는 지맘대로 식는다.
뜨겁다에서 바로 차갑다로. 중간이 없는 커피다.
영채는 통유리 창 앞에 테이블에 앉아서 영지가 보내준 노란 은행잎에 둘러싸인 남산타워 사진을 다시 보고 있다. 영지는 어떤 친구일까 생각중이다.
아니 영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중이었다.
‘영지와 같은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면 서울생활이 많이 차갑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공모전도 영지가 해보는 게 낫겠다고 조언해서 시작한 터였다. 적절한 시기를 타진 중이었는데 직선적으로 마치 명령하듯 "너 그거 해!"라고 했다. 더 늙기 전에, 자연적 노화는 인간의 힘으로 늦출 수 없다며 영채를 재촉한 터였다. 그 말에 이유가 있어서 수용하여 진행한 면이 있었다. 영채 입장에서 영지는 현실적이라서 좋았다.
영채는 새벽에 영지에게 보낸 장문의 카톡을 읽어보았다. ‘그동안 서로가 잘 몰랐던 것 같은데 연락하게 되어 다행이며, 응원해 준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인간적인 실망이 아니라면 오래 보자’는 내용인데, 제법 아슬아슬하게 적정거리를 두고 잘 쓴 글빨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감동유쾌할. 그리고 다시 영지가 그 답장이라고 보내준 노랗게 물든 남산타워 사진을 다시 바라보고 있다.
커피가 차가워질 무렵, 영채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의 긴 장문의 편지에 답장대신 보내온 남산타워 사진을. 그렇게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사진 속에서 영지의 셀카 한 장이 없었다는 것을. 남산에 혼자 가더라도 영채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끝까지 유지해야 할 서로의 간극의 선임을 알리는 것처럼.
영채는 영지의 그런 모습이 나쁘지 않고 좋았다. 한편으로는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하여 다행이었다. 원점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영채는 영지에 대한 다단복제된 마음을 거둬들여 원래대로 하나로 유지하기로 했다. 영지가 원하는 관계의 평행선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고, 서운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스럽기도 했다. 심플했다.
혼자간 남산타워 사진. 남산타워 주변으로 노란 은행잎이 화려한, 경쾌한 젊은 생기넘치는 이유는 뭘까? 색채학 때문인가?
영채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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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을 다 써보네요 ㅎㅎㅎㅎ 심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