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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능 May 21. 2024

덴마크, 모든 우연이 실현되는 곳

오늘 우린 우연히 마주쳤지. 아마 내일도 마주칠 거고 

덴마크인이 나에게 물었다.  


"서울에서 아는 사람 마주쳐 본 적 있어?"


특이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서울은 1000만 명 가까이 사는 대도시기 때문에 특정 장소가 (이를 테면 동네 PC방?) 아닌 이상 길 가다 누군가를 우연히 마주치는 건 꽤 드문 일이다. 내가 서울에서 어딘가를 이동할 때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칠 거라는 기대는 해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손에 꼽는다. 


언제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줄여서 동역사) 역에서 5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에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한 친구의 전 남친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건데 전날 과방에서 과음하고 집에 가는 추레한 모습으로 나와 마주쳐서 꽤 민망해했다. 그 이후 주변 친구들에게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고 공유했고 다들 어떻게 지하철에서 그렇게 딱 만날 수가 있냐며 신기해하는 반응이었다. 아직도 그 친구를 거기서 우연히 만난 건 가끔 쓸 수 있는 좋은 안주거리다. 서울에서 우연한 만남이란 희소성을 띄는 만큼 주변 사람 사이에선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 아빠는 안동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빠 시골집을 놀러 가서 사촌들과 개울에서 놀고 있으면 가끔 어르신들이 다가와서 누구 딸이냐고 물었다. 아빠이름을 대면 다들 내가 누구 딸인지 바로 알아봤다. 서울에서 내가 저는 누구의 딸입니다라고 소개한다면 다들 뭐 어쩌라는 반응이겠지.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 인구는 약 110만 명이다. 면적은 86.4k㎡로 서울이 605.21k㎡인걸 생각하면 서울의 행정구역 두세 개 정도 크기의 작은 도시다.


그만큼 코펜하겐에서 생활하다 보면 길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마주치는 이벤트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된다.  


아는 사람도 많이 없는 내가 작년부터 지금까지 겪은 우연적 만남을 써보자면...


-어학원 선생님이 동네 산책하다 내가 집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보고 어디에 사는지 알게 됨

-알고 보니 우리는 한 건물 건너 사는 이웃이었다

-그 뒤로 장 보는 길에 몇 번 마주쳤다 더 이상 어학원을 다니지 않아 어색하게 인사

-자전거를 끌고 어딘가 걸어가는 중에 나랑 같은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조금 특이한 자전거라 덴마크에서 같은 자전거 가지고 있는 사람을 처음 봤다며 서로 반가워함

-그 이후에 친구 서너 명이 길 가다 이 할아버지를 만났고 멀리서 찍은 사진을 나한테 공유해 줌

-길에서 이전에 봉사활동을 잠시 하던 카페에서 친구 1을 만났다. 

-길에서 누군가의 전 여친을 만났다. 그다음 주에 또 만났는데 모르는 척했다.

-장을 보러 슈퍼에 들어가는데 잠시 일하던 카페에서 나를 안 좋아하던 매니저를 마주쳤다.

-자전거 타고 가는 길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쳤다. 그 이후로 한 다섯 번은 마주쳤다.

-일하는 중에 이전에 지원해서 최종면접에서 떨어진 회사의 면접관을 만나서 도망갔다.

-주말에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최근에 일을 시작한 별로 친하지 않은 분을 마주쳤다

-며칠이 안돼서 또 마주쳤는데 집에서 나오는 걸 알아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주거지까지 확인하게 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작년에 여름에 만났던 친구랑 반갑게 인사했다.

-우유를 사러 가는 길에 누군가 나를 불러서 돌아보니 같은 곳에서 일하는 분이었음.

-여기에 사신다고요?. 우리집에서 고작 1분거리다. 창문너머로도 보인다. (역대급 최단거리..)



지금 생각나는 것만 나열해도 이 정도다. 서울에서 평생을 살아도 저만큼 우연하게 누굴 만나거나 알고 보니 이웃인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작은 도시에 살면서 생기는 재밌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마추 지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쓸 때 없는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경우도 있더라. 


코펜하겐 토박이인 친구들은 날씨 좋은 날에 돌아다니면 아는 사람을 5-6명씩도 만난다고 한다. 보통 길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밥먹듯이 우연히 누군가를 마주치게 된다면 조금 피곤한 일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전 여친이나 전 남친을 계속해서 마주쳐야 하는 것만큼 성가신일이 있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기 사는 사람들은 전애인이랑도 쿨한 사이를 잘 유지하는 편이다. 


코펜하겐 같은 소도시에 산다면 웬만하면 모든 지인과 되도록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게 좋다. 그래야 니가 나중에 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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