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5% T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순간이 몇 없었고, 살면서 딱히 큰 문제가 된 적도 없었다. 모든 문제를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는 것이 나에겐 위로였고 방법이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말로는 고생을 하게 되면서 감정이 꿈틀꿈틀 깨어나기 시작했다. 과다한 업무량, 정해진 보고 시기에 딸린 압박감, 상사 대접, 기어오르는 후배 등 정신없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평소와 똑같은 귀갓길에도 그날따라 한 장면 한 장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전쟁터와 같았던 사무실과 대비되는 평화로운 길거리, 사회생활의 가면을 벗고 나의 방식과 속도로 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과 불그스레한 해질녘까지, 한껏 센티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곤 느낀다.
'감정이란.. 아름다운 거구나..!'
감정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 순간과 그 순간의 감정이 즐겁고, 조금은 나를 위로해 주는 느낌을 준다.
신영복 선생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며, 오래된 정서를 강조한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다 안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삶이 즐거운 사람은 긍정적인 감정에 특화돼 있고,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은 그 반대다. 되도록 모든 감정에 충분히 공감하며 이해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삶에 이롭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관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의 말씀대로 정한의 중요성을 가슴에 간직하며 살겠다.
p137
연대는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대입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적인 연대에 소홀해지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이해관계를 파악한 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사람과는 미소가면을 쓴 채 지내고, 영양가가 없는 사람에겐 사회생활로 꼭꼭 묶어뒀던 봉인을 일부 풀어, 약간은 함부로 대하여도 문제가 없다. 직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문제는, 어떤 관계든 간에 인간적인 유대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까지 살고 싶은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지?' 등이다.
인간적 교감이 당장 실용적인 이점이 없는 건 사실이다. 다른 사람과 진실된 정을 나눈다고 해서, 연봉이 오르거나 승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계산을 토대로, 인정을 뒤로한 채,얍삽하게 제도를 활용하는 사람이 더욱 사회적으로 잘 산다. 하지만 나는 인간적인 교감이 더 좋다. 사회적 이득만 바라보며 살다 보면, 그 끝은 허무로 끝나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인간적 연대는 정신건강에 매우 이롭다. 인간적 유대가 잘 형성돼 있는 사람은 정신이 맑고 활력이 있으며 주위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한다. 물론 이 점을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너그럽게 용서하고 적당히 대해주면 되겠다. 결국 제 행동에 대한 결과는 본인이 지게 돼있다.
오래전부터 독서는 교양의 상징이었다. 역대 위인 중 독서광이 많았고, 당장에 부모도 자식에게 어떻게든 독서를 시키려 한다. 독서의 목적은 보통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간접경험에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한평생 바쳐 일궈낸 결과물을 단 한 권의 책으로 경험할 수 있다. 참으로 유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간과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독서의 목적이 무엇일까. 각자의 인생을 더욱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려는 데 있지 않은가. 결국 최종 목적은 각자의 인생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침이면 시작되는 나의 하루, 등교나 출근 후 접하는 사회생활, 퇴근 후 만나는 나의 가족, 잠들기 전 되돌아보는 나의 하루 등이 독서보다 실로 내 인생에 가깝다. 독서는 중요하지만, 간접경험일 뿐이다. 하루 일과가 내 인생의 본 대회다. 독서도 좋지만, 나의 하루를 보내며 도전하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 더 큰 공부다. 하루하루를 그저 흘러가는 인생이 아닌, 희로애락 애오욕을 느끼며 공부하자.
p277
우리가 사물이나 역사를 인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과 내가 맺는 관계라는 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신영복 선생과 나는 비슷한 결의 사람일까 하고 감히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심영복 선생의 글을 읽을 때 근거는 없지만 와닿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 글귀도 그중 하나다.
사물과 나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강한 확신이 든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방'에서 '에어컨'을 켜두고 '의자'에 앉아 '책상'에 설치된 '컴퓨터'를 통해 이 글을 적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이 사물에 대한 제값을 치렀고, 이 사물들은 내게 안락한 보금자리와 편안함을 선사한다. 내가 이 글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물의 관계(감사함)를 인지하는 순간, 나의 삶은 건강해지고 정신은 맑아진다. 그에 따라 삶에 활력이 생기고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뭐 하나 허투루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다양한 감정이 있다. 간략하게 구분해 보면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한다. '대부분'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하지만 어느 감정이 좋고 나쁘고는 철저히 인간의 기준으로 구분된다. 우주가 인간을 만들 땐 무엇 하나에 특별한 비중을 두고 않고, 자연스럽게 만들었으리라.
정말 긍정적인 감정이 좋고 부정적인 감정이 나쁜 걸까. 미움으로 인해 좋음의 가치가 부각되고, 분노로 인해 가족을 지킬 수 있고, 슬픔으로 인해 멋진 시가 탄생했으며, 욕망으로 인해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 또한 소중하게 여기자. 모든 감정은 제 역할이 있고 이점이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감정은 오점 또한 있으니, 본인의 역량을 키워 감정을 잘 다루도록 하자.
p350, p351
문제는 부부 관계마저도 상대적 가치형태로 인식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 가치로서 판단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의식 형태입니다.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인간관계마저도 화폐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천민적 사고입니다.
(중략)
이처럼 상품사회의 문맥이 보편화되어 있는 경우 인간적 정체성은 소멸됩니다. 등가물로 대치되고 상대적 가치형태로 존재합니다. 상품사회의 인간의 위상이 이와 같습니다. 인간 역시 상품화되어 있습니다.
와이프는 집이 가난하다.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고, 결혼할 때 혼수비용으로 200만 원을 가지고 온 것이 전부다. 물론 결혼을 결심했을 때 가난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와이프는 진실되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이것으로 결혼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예상과 달리 결혼생활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나 역시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으며,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었다.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익보다 지출이 많을 때 혹은 미래계획이 꼬일 때마다 지금의 와이프보다 경제적으로 평범한 집안과 만났더라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수없이 상상했다. '결혼은 현실이다, 결혼은 돈으로 하는 거다'라는 말이 조금은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읽고 내 생각은 180도 달라졌다. 현실에 허덕이다 보니, 어느 순간 결혼을 결심할 즈음에 느꼈던 낭만은 모두 잊고 없었다.
'그래, 나는 와이프의 경제력을 보고 결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 그 자체가 좋아서 결혼을 한 것이었다'
와이프는 나의 인간적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와이프를 아끼는 것이 나를 아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p408
양심적인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이며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양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역량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라 해야 합니다.
양심적인 사람. 요즘 통 찾아보기 힘들다. 양심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양심을 지켜봤자 사회적으로 이득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양심을 지키는 사람을 바보취급하는 경우도 자자하다. 양심을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도 그 마음을 싹 가시게 만든다.
양심의 가장 어려운 점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꼼수를 부릴 때는남의눈만 피하면 되지만, 양심은 나 스스로 지키지 않거나 적당히 조율한 것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양심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주위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양심적인 것 같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나도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남과 다른 점은 양심을 무차별하게 팔아버리지만 않았을 뿐이다.양심의 존속 여부를 유예만 시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