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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 Jun 04. 2024

글의 온도

온라인 글쓰기(8)

일본 도쿄 센소지. 오후 5시쯤

  글에는 온도가 있다. 문학이라면 글을 읽을 때 느끼는 따뜻하고 차가움의 정도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감탄하는 소설 '설국'(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첫 문장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였다. 추운 설국에 대한 설명인데 문장의 아름다음이 외려 따뜻함을 전하는 모순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산문을 주로 쓰는 언론계에서 온도란 '편향성에 대한 정도'를 뜻하는 경우가 꽤 있다. 누군가 '글의 온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면 글이 다소 편향적인 느낌이 든다는 의미다. 정치적 편향이든 자본에 대한 것이든 혹은 사람에 대한 편향이든 글의 중립성이 흔들린다는 얘기다. 물론 온라인 글을 읽다보면 일부러 편향적인 글을 쓰거나 편향적인 주장을 하고 동조를 얻는 것이 목적인 글도 꽤 있지만, 옳고 그름보다는 글의 온도를 조절하는 이유와 그 방법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편향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이 글에서는 편향성이라는 단어를 의미중립적으로 썼다는 의미다.  

  내 경우는 특히 정치 이슈, 젠더 갈등, 부의 불평등 등에 대한 글을 쓰면서 편향성에 대한 고민을 한다. 산문에서 글의 온도(편향성)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팩트 자체다. [북한이 오물풍선 3500개를 2024년 5월 28일부터 5일간 우리나라로 보냈다. 항공기 이착륙이 몇번이나 중단됐고, 오물 뭉치가 떨어지면서 주차된 자동차의 유리창이 깨지는 일도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무엇을 생략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편향성이 생긴다. 특히 사실을 나열하는 순서나 방법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편향성은 달라진다. 

  이 뒤에 붙을 수 있는 사실은 다양하다. 우선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이 대북전단을 북한으로 연이어 살포했던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북한은 주장했다]는 문장을 붙였다면, 원인 제공자는 우리나라다. [자동차 유리 손괴 등 우리나라 국민 피해가 본격화 됨에 따라 남북 간 국지전 가능성도 있다고 저명한 전문가들이 밝혔다]고 썼다면 남북 간 강대강 대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또 [북한의 오물풍선 사안에 대해 여당은 전 정부의 대북전단금지법이 원인이라고 비난했고, 야당은 이번 정권의 대북 불통 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했다]는 문장을 붙였다면, 한국 내 내분이 벌어졌다는 의미로 북한의 목표 중 하나가 이뤄졌다고 읽힐 수 있다.

  그렇다면 글의 기계적 중립은 가능한가? 개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일부러 편향적인 주장을 담는 경우는 당연히 중립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글쓴이가 중립성을 지키려 해도 편향성은 무의식적으로 글에 녹아들곤 한다. 무의식적인 편향의 원인 중 하나는 우리의 경험이 한정적이라는 데 있다. 일례로 민감한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정치부 기자의 경우 여당팀과 야당팀으로 나뉘고, 여야 중 한쪽만 경험하는 기자도 적지 않다. 여당팀 기자는 야당의 논리에 인색해진다. 하루 종일 여당의 논리만 듣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는 경도된다. 물론 편향을 피하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하지만, 듣고 보는 게 늘 같으니 자신도 모르게 여당의 논리를 당연하게 글에 담을 수도 있다.

  또 정당 취재 경험은 풍부한데 대통령실은 취재해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대통령의 통치행위 보다는 당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기준으로 사안을 보기 쉽다. 대통령은 수직적 당정관계(대통령실이 당무에 관여하는 방식)가 긍정적인 소통방식이지만, 정당에서는 독립성을 강화해 대통령실과 대등하게 협의하는 수평적 당정관계를 긍정적으로 본다. 여당에 무게를 두면 대통령이 너무 권위적이고, 대통령에 무게를 두면 여당이 너무 비협조적이다. 편향적 시각이 미세하더라도 글에서는 큰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언론사는 여당반장과 야당반장의 위에 국회반장을 두고, 국회반장과 청와대 출입기자 위에 정치부장을 세운다. 또 여러 부장 위에는 편집국장이 있다. 이런 조직 구조는 편향성을 줄이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편향성을 줄이려는 뜻이 있다면 스스로 확인하고 누군가에 물으며 개고를 할 수록 나름의 중립에 다가설 수 있다. 

  또 글쓴이는 팩트 뒤에 분석이나 해석을 붙일 수 있는데, 이 역시 편향성을 결정하는 요소다. [한 정당은 노인 지하철 무임 승차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는 사실 뒤에 [노인 표심을 거의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청년 표심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을 했다면, 이 정당은 결국 표를 얻으려고 정치적 작업을 했다는 뉘앙스를 준다. 반면 [서울시의 지하철 적자가 눈덩이로 불어나는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용기있는 정당으로 읽힌다.

  편향성을 줄이고자 한다면 중요한 건 꼼꼼하고 넓은 취재다. 기계적으로 찬반 양측을 늘어놓기보다 편향적인 사안이라면 편향적으로 보여주는 게 글의 중립이다. A 집단의 지도자 B씨에 대한 여론을 알고 싶다면 A 집단에 있는 최대한 많은 이들을 접촉해야 한다. 설문조사도 좋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A 집단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간접 취재를 하되 그 언급을 검증하고 교차 확인한 뒤 그의 온도 그대로 전하도록 노력한다. 취재원이 "A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몇 있다"는 언급을 토대로 [A씨를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거나 [A씨의 리더십이 칭송받고 있다]는 식으로 일반화하지 않도록 연습한다. 

  물론 사진을 찍듯이 완벽하게 현상을 그대로 글로 옮기면 좋겠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슈는 다층적이고 함의를 담고 있으며 눈으로 볼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곳에서 변화하는 생물이다. 오늘 '혁신 상품인 시티폰은 영원하다'고 썼는데 며칠 뒤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와 혁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C기업 사람들이 D사장을 입이 마르게 칭찬했는데, 이면에서 그들은 주가조작의 공모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편향을 줄이려는 노력, 즉 글에 사익이 있는지, 내 본연의 편향성이 녹아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타인이 내 글을 읽으며 세상의 단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있는 그대로 글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글쓴이의 책임이기도 하다.

  글의 온도는 결국 표기법으로 조절하게 된다. 사례를 들자면 직접 인용 문장의 어미로 [비판했다, 비난했다, 직격했다, 말했다, 전했다, 설명했다, 주장했다, 언급했다, 밝혔다] 등의 다양한 표현이 있고 무엇을 고르냐는 글의 온도를 미묘하게 바꾼다. [그는 "A씨가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그의 주장일 뿐이다. [그는 "A씨가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그는 "A씨가 사퇴해야 한다"고 비판했다]는 A씨가 뭔가 잘못한 상황으로 보인다. [그는 "A씨가 사퇴해야 한다"고 직격했다]는 비난자의 공격성이 강조된 것이고 [그는 "A씨가 사퇴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권위있는 사람이 말했다는 느낌을 담고 있다. [그는 "A씨가 사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는 사퇴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뒤에 나올 것 같고, [그는 "A씨가 사퇴해야 한다"고 전했다] 다른 이의 말을 대신 전달한 것이다. 

  이런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습득하냐고 첫 글쓰기를 시작하는 후배들이 물으면 베테랑 기자들은 '필사'를 권하곤 한다. 각 상황이 어떤 온도의 글로 옮겨지는지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현실에서 불가능하니, 다른 이의 좋은 글로 온도 조절 방법을 습득하라는 취지다. 글의 온도는 상황과 사안에 따라 변화 무쌍하니 일괄적으로 알려주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또 개인의 능력이나 감이 달라 결국은 자신에 맞는 방식을 체득하는 수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결국 중립적인 글이란 내가 오감으로 습득한 것을 최대로 그대로 전하려 노력하는 글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해서 설명하려다보면 가치 판단은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립이란 나의 이익, 즉 사익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고 사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노력의 과정이다. 또 글의 온도를 세심하게 매만지는 노력의 과정이기도 하다. 기계적인 중립은 무책임하지만, 지속적인 편향성의 축소 노력은 내 글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작업이다.

  필사의 효과는 꽤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생각보다 빠르게 글에 묻어난다. 필사 공부를 한 후배들을 보니 그렇다. 공통적으로 [결과적으로, 결국, 그래서, 종국에는, 이에 따라, 그러므로] 등 비슷해 보이는 연결어가 글에서 많이 사라진다. 글 자체로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구태여 연결어가 필요없어졌을 것이다. 주어와 술어의 불일치 사례가 줄었다. 개인적으로 필사의 대상은 신문 사설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논설위원이 그 짧은 글 하나를 위해 하루 종일 투입된다. 또 신문사에서 가장 글을 잘 아는 사람이 층층이 감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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