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커 신전'을 다녀오고
0.
- 상습숭배
어제 페이커 카페에 갔습니다
페이커 카페가 열린 건 아니고요
그냥 카페에서 페이커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카페에 간 건 아니고요
그냥 집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사실 커피도 안 마셨습니다
그냥 페이커 상태입니다
세상에 70억명의 페이커 팬이 있다면, 나는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상에 1억명의 페이커 팬이 있다면., 나 또한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상에 천만 명의 페이커 팬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상에 백 명의 페이커 팬이 있다면, 나는 아직도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상에 한 명의 페이커 팬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세상에 단 한 명의 페이커 팬도 없다면, 나는 그제서야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페이커, 나의 사랑.
페이커, 나의 빛.
페이커, 나의 어둠.
페이커, 나의 삶.
페이커, 나의 기쁨.
페이커, 나의 슬픔.
페이커, 나의 고통.
페이커, 나의 안식.
페이커, 나
누군가 내게
"페이커를 얼마나 사랑했나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외면하며 "손톱만큼이요" 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돌아서서는,
잘라내도 잘라내도 평생 자라나고야 마는
내 손톱을 보고 마음이 저려 펑펑 울지도 모른다
젠장, 또 대상혁이야. 이 글만 보고 자려고 했는데, 대상혁을 보고 말았어.
이제 나는 숭배해야만 해... 숭배를 시작하면 잠이 확 깨 버릴 걸 알면서도, 나는 숭배해야만 해.
그것이 대상혁을 목도한 자의 사명이다. 자, 숭배를 시작하겠어.
1.
- Faker Temple
지난 5월 23일, "페이커" 이상혁이 LOL E Sports 전설의 전당에 최초 헌액되었다. 현역 선수임에도 1호 헌액자라는 사실에 이견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그를 기념하여, 지난 5월 29일부터 서울 종로 하이커그라운드에서 '페이커 신전(Faker Temple)'이라는 팝업이 열렸다. 개장 첫날 3000명이 넘는 사람이 다녀갔고, 현충일 연휴에는 건물 밖 큰길까지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본인은 개장 2일차인 5월 30일에 그 현장을 다녀왔다.
전설의 전당 헌액을 기념함과 동시에, 페이커의 커리어를 반추해 보는 공간이었다. 입장과 함께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팜플렛을 지급하고, 총 여덟가지 코스를 이행하고 스탬프를 모두 채우면 상품을 지급하는 방식인데, 그 코스 안에는 가능한 거의 모든 방식의 팝업이 들어 있었다. 인생네컷, 영수증 형태의 사진 찍기(이건 뭐라고 이름 부르는지 모르겠다), 페이커 팬 고사, 응원 치어풀 제작, 가장 좋았던 순간 투표 등... 거기에 전설의 전당 스킨 체험까지. 이 이외에 가능한 팝업의 형태가 무엇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오늘은 팝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주제가 아니기에 여기까지만 하자.
2.
- 기습숭배
시작 부분에 언급한 것처럼, 페이커 관련하여 '기습숭배'라는 밈이 있다. 말 그대로, 맥락없이 페이커를 언급하거나 그의 대단함을 샤라웃 하는 일종의 인터넷 문화이다. 본래는 그닥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지난 '23 월드 챔피언십'에서 모든 헤이터들의 의심을 불식시키며 우승을 차지했기에 '기습 숭배'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그의 긴 커리어 동안 구설수가 없었다는 맥락이 더해져 뜬금없이 그를 칭찬해도 모두가 동조하는 것이다.
그런 인터넷 밈에서 시작한 '기습숭배'를, "페이커 신전"에서 활용하였다. 음지에서 시작한 문화가 양지로 나온 것이다. 8개의 스탬프 코너 중 하나로, '기습숭배 Zone'에서는 커다란 페이커 사진 앞에서 '대 상 혁'을 외치며 숭배를 한다. 그 구역에 서 있는 직원이 이렇게 말을 한다. "경건한 마음을 담아 경배하세요". 마치 신에게 경배하는 것처럼. 그리고 많은 팬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들거나, 진짜 신에게 경배하듯, '대 상 혁'을 외치며 말 그대로 "숭배"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ea5QQhkbe4
- 45초, 1분 49초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v-Bx23vezc8
- 11초, 1분 13초 참고
신을 믿는 나는, 이 지점에서 묘한 감정이 든다. 물론, 이건 밈이고, 문화이고, Just for fun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불편함 내지는 이상한 감정은 가시지 않는다. 방문하기 전, '기습숭배 Zone'에서 쭈뼛거리면 직원이 다시 하라고 시킨다는 후기를 인터넷에서 보았다. 묘한 그림이다. 고대 신정국가의 의식, 내지는 왕정 국가에서 임금을 알현하거나 권력자 앞에서의 구도와도 겹쳐 보인다. "대상혁을 알현하는데, 어찌 그런 불손한 태도를....!"와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그렇다. 그런 이유로 굉장히 묘하다.
페이커의 가장 대표적인 별명 중 하나는 '불사대마왕'이다. 그 별명에서 착안하여 전설의 전당 관련 유튜브 영상의 제목도 '대마왕의 유산'이라고 붙었다. '대마왕'을 밀고 있다. 팝업의 이름이 'Faker Temple'이니, 대마왕의 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이상한 상상력을 발휘 해 보자. "요즘 젊은이들이, '대마왕의 성전'이라는 곳에 가서 줄 서서 숭배를 한답니다. 대마왕, 곧 사탄이오 바알세불은 문화의 힘으로 청년들을 무릎꿇립니다"라고 어떤 목사가 설교를 할 법한 구도가 보인다. 이상혁을 그런 도당의 우두머리로 둘지, 혹은 그저 이용당한 안타까운 청년으로 볼지, 그건 내 상상력 밖의 일이다.
페이커에게 '대마왕', '천마', '마교'와 같은 기믹이 잡혔기에 LCK 사진작가들은 이런 지점을 잘 잡아 멋진 사진을 찍는다. 그런 사진을 보면서, '진짜 교주 같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팬들은 동시에 '진짜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우스개로 하기도 한다. 묘하다. 굉장히 묘하다.
한편, 이 '전설의 전당 헌액' 사건은 LOL Esports가 실로 불안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이 씬을 지켜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실력도 뛰어난데, 인성과 성품 마저도 훌륭한 그가 GOAT여서 이 판은 축복받았다"고. 그래서, 그에게 달린 것이 매 해 커질 뿐이다. 놀랍게도 페이커는 그 커지는 기대를 매 해 완벽하게 부응하고 만다. 그렇기에 '숭배'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별명만 마왕이지, 이 서사에서 그는 영원히 왕자이다. 그 누구도 그의 아성을 넘볼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영원할 수 없다. '전설의 전당'에 헌액되는 순간이, 불꽃놀이의 가장 화려한 순간이 아니길 바란다. 이런 내 생각이, 그저 예언이 들어맞고 싶어 괜한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는 염세적인 사람의 저렴하고 값싼 예단에 그치고 말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3.
- 살아있는 숭배 대상
시선을 인간 '이상혁'에게 돌려보자.
모두가 그를 존경한다. 모두가 그를 숭배한다. 게임 외적으로 부정평가 하나 없다. 그에 대한 부정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억지 소수의견에 불과할 것이다. 살아있는 채로 숭배받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도 사람이다. 내 동년배다. 물론, 나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성숙하고 연륜이 쌓였다. 그렇지만, 물리적인 나이가 많지 않음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치기어림이 그에게도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도 사람이기에 좋은 평가,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기쁜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기자회견이나 공식석상에서 하는 겸손한 발언은, 진심인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애초에 억누르기 위한 의도적인 애티튜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지점을 곱씹을 수록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살아있는 채로 숭배를 받는 인간은, 아까도 언급 되었듯, 사이비 교주 정도나 될 것이다. 교주를 향한 신도는, 금전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교주의 뜻을 위해 본인을 도구화 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다. Faker Temple에 가는 사람들과 구조적 동질성을 갖는다. 페이커를 보러 가는데에, 50만원 상당의 전설의 전당 스킨을 구매하는 데에, 값비산 페이커 굿즈를 구매하는 데에. 페이커가 홍보대사로 있는 유니세프에 후원을 하는 데에 아끼지 않는다. 구조적으로는 동일해 보이지만, 그 컨텍스트는 굉장히 상이하다. 페이커는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의 돈과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에게 어떤 이슈가 생길까 두렵다. 차라리 게임 내적 이슈는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게임 외적인, 인간적인 이슈가 터지는 것이 두렵다. 그가 언젠가 교만해져서, 어떤 일을 벌일까봐 두렵다. 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도 실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을까봐 두렵다. 타인이라면 용납될 만한 실수를, 그라서 용납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우리가 보낸 모든 찬사와 박수와 경애하는 마음의 절대치만큼, 음의 값으로 돌려줄 까봐 두렵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 까봐 두렵다.
페이커 이상혁은 96년생, 스물 여덟이다. 큰 일이 있지 않는 한 그는 살아 갈 날이, 앞으로 산 날보다 길 것이다. 그의 서사가 임요환처럼 연착륙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4.
- 여담
한편, 팝업에 대해서 재고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것이 '헤펐다'. 상술한 만큼, 가능한 거의 모든 종류의 팝업이 집합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는데, 스탬프를 받기 위해 한 사람당 한 장의 시험지와, 한 장의 치어풀과, 감열식 사진. 모든 것이 헤펐다. 내가 도장 하나 받겠다고 비싼 종이를 이렇게 무용히 낭비해도 괜찮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페이커 신전 마지막에는, 그가 홍보대사로 있는 유니세프 관련 전시물이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또 한 번의 묘한 구도를 떠올릴 수 있다. '페이커와 함께 지구촌 이웃을 함께 도웁시다'라는 메세지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낭비가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한편으로 유니세프에서는 직원 몇 명 보내 저기서 후원 신청 받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아마 꼬인 것일테다. 물론 이것은 페이커의 잘못이 아니다. 팝업과 전시 일반의 문제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
페이커만 지속 가능한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페이커가 지속 가능할 수 있는 토대가 지속 가능하길 우리 모두는 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