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방에 대한 상상력
5월부터였나. 내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에 이런 유형의 릴스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릴스의 내용을 대강 요약하자면, 대도시에 사는 주인공이 돈을 열심히 벌었지만, 빌릴 수 있는 집은 고작 "Coffin"같이 작은 크기의 방일 뿐이다. 그래도 살야아 하기에,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방을 리모델링 하는 것이 주된 소재이다. 굉장히 거창하게 확장 공사를 하고, 굉장히 밀도 있게 공간을 사용하려는 아이디어는 정말 참신하다는 말로 담기에 부족할 정도로 참신하다. 우리네 고시원은 굉장히 살기 편한 환경처럼 보일 지경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설명해 무엇하겠는가. 전형적인 예가 되는 링크를 몇 첨부하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3w9G3dENQ5Q
https://youtube.com/shorts/HkOmqx_Ud0c?feature=shared
https://youtube.com/shorts/xw0bG5ahdbY?feature=shared
굉장히 초현실적이다. 상상해봄직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루어질리 만무한 집이다. t하지만 이러한 조야한 상상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출발점은 우리에게 허락된 공간이 굉장히 좁은 곳이라는 것. 꿈의 배경마저도 좁은 공간이라는 것. 우리의 상상력의 범위가 좁아졌다는 것. 이런 것이 핵심 아닐까.
그리고 내 귀에 들어온 단어가 있었다. "Galvanized"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리고 뜻은 '아연도금한' 정도 된다. 이런 쪽에 굉장히 문외한인 나는 아연을 도금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산업현장에선 흔히 사용하는 자재임을 알게 되었다. "Galvanized"라는 말에 대한 생소함은 비단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Galvanized"라는 말이 릴스 영상에 등장하면, 사람들이 '�️GALVANIZED STEEL��' 같은 댓글을 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밈 화' 된 것이다. 이러한 초현실주의 방 디자인 릴스에 있어서, 만약 'Galvanized'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으면 'No Galvanized Steel'이라며 못내 아쉬워하는 댓글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이 'Galvanized'밈이 확대/재생산 되는 양상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_GS9DaQKKM
'Galvanized'라는 말이 밈 화 된 것을 보고, 몇 가지 의미 지점을 포착할 수 있었다.
Galvanized[ˈɡæl.və.naɪzd]
말맛이 참 좋다. 전문용어. 우리로 치면 어떤 말 정도로 치환할 수 있을까. 전문용어인데다가 말 자체가 어려워서 일상에서 등장하면 굉장히 이질적인 표현. 우리네 상황으로 치환하면 어떤 말에 대입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명징하게 직조해 낸" 이 떠올랐다. "명징 직조" 자체가 한동안 밈이 되기도 했으니까. '명징직조' 사건을 통해 이동진이 어려운 표현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 이돈주인은 OO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밈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맥락은, 이동진이 쉬운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방증임과 동시에, '명징직조' 사건의 연장선에서 유머코드를 가져온 것일테다. 아무튼, 어려운 말이 일상의 영역에 등장했을 때의 이질감은 만국 공통의 정서인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Galvanized'가 받아들여진 것 같다.
'Galvanized' 영상에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그것들을 모아 나름 일반화 해 보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 주인공은 이민자 출신이라는 속성.
- 직장 이슈로 인해 대도시에 거주.
- 얻을 수 있는 공간은 비현실적으로 좁은 공간.
- 정주의 공간을 꾸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조력자가 필요함.
- 가정을 꾸린다면 아이가 굉장히 많음.
- 그리고 상술한 초현실적인 리모델링.
- 하지만 거창한 리모델링을 거쳐봤자 허락되는 것은 그렇게 편하지 않은 공간.
이 밈의 출발점이 빌리빌리 영상에서 출발했었고, 그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 미국으로 간 만큼, 어느 정도는 혐오적 정서가 웃음 코드로 작용했다는 것은 분명 감안하여야 할 지점이다. 혐오적 정서가 있기에 스테레오타입을 밈의 요소로 활용한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아이를 많이 낳는다던가(20명에서 100명까지 그 바리에이션은 일단 기괴한 숫자로부터 시작한다), 공자를 숭배한다던가 하는 예들 말이다. 동시에, 우리의 주인공은 굉장히 무능하기 때문에 무조건 친척의 도움을 빌려 Galvanized Steel을 마련한다.
하지만,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정서. 집에 대한 갈망. 정주하고 싶은 곳에 대한 갈망이다. 몇몇 영상에서는 집을 마련하기 전 시간까지는 독수리에 매달려 있었다고 배경 상황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만큼 위태로운 상황을 보내왔다는 이야기이다. 굉장히 좁은 공간이어도 내겐 족하다는 정서를 이해시키는 배경인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 억지로 확장시켜 의식주의 기능을 가능케 하도록 방을 개조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녹록찮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방에 애인을 데려오고, 아이를 낳겠다는, 생에 대한 의지까지 의미를 부여하는데에 이른다면 눈물이 날 것만도 같다.
이런 풍경, 우리네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론적으로 작은 집에 대한 상상력은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 공통적인 것이라는 지점을 포착한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작은 집마저도 감당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까지.
그리고, 현실로 시선을 확장해보자. 작은 집에 대한 상상력은 절대 공상의 영역이 아님을 저리게 알게 한다.
https://www.ikea.com/jp/en/campaigns/ca00-tiny-homes-application-pub67766270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27207#home
지난 2021년, 일본 이케아에서 도쿄에 3평짜리 방을 단돈 천원에 렌트를 해준다고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당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천원짜리 집이라니. 한달에 천원이라니. 그것도 도쿄에. 자세한 위치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도, 우리의 사정으로 치환해 본다면 서울 구석동네여도 한달에 천원짜리 방이라면 감사합니다 하고 살 것 같다. 거기에다 모든 가구가 이케아 가구로 채워졌다니. 저렴한 가격에 집도 제공하는데, 안에 채워야 할 가구들도 죄다 미니멀한 감성의 이케아라고? 그런데 이런 방에 단 돈 '백 엔'이면 살 수 있다고? 이거 완전 대박이잖아?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고작 세 평 짜리 방에 만족하고 살아야 한다는 우리네가 어째 슬프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방의 계약기간은 작년 1월 말까지였다. 이 실험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조야한 내 서치 능력은 이에 대한 후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만약 이 사업이 평이 괜찮았다면 2기 3기로 계속 진행했겠지만, 일회성에 그친 이벤트였을 것이다라는 추측 역시 가능하다.
"이케아는 홈페이지를 통해 3평의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면서도 "공간의 수직 활용이 핵심이다. 공간을 3차원으로 나누니 제한된 공간에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났다"고 밝혔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27207
수직 활용. 3차원 활용. 어딘가 묘한 지점이 떠오른다. Galvanized Steel 영상의 핵심 역시 치밀한 수직 공간 활용에 있다. 사실 예견된 미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방이 과연 구룡성채 속 'Coffin Room'과 무엇이 다를까.
https://www.youtube.com/watch?v=hLrFyjGZ9NU
홍콩의 비싼 Rent와, 그에 대조되는 작은 방 크기는 코로나 이전 시기부터 지적되어 오고 있었다. 이런 생존의 공간을 보고 있노라면, 이케아 재팬의 방과 Galvanized Steel 방과 굉장히 대조된다. 홍콩의 Coffin Room은 비극적이고, 현대 문명의 모순 같아 보인다. Monthly Rent가 굉장히 비싼데, Coffin Room이라서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이케아에서 하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상단의 링크에서 엿볼 수 있는 홍콩의 방은 더럽고, 어둡고, 어두침침해 보이고, 습해 보이고, 우울해 보이는 말들로 키워드화 할 수 있다. 브랜드 '이케아'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한가. 깨끗하고, 매끄럽고, 단단하고, 따듯하고, 단란하다 정도가 떠오른다. 거기에다 저렴하다. 이 두 가지 층위의 이미지가 교차하여 우리 스스로를 홍콩의 Coffin Room과 구조적 동질성을 가진 공간으로 몰아넣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
사실 우리는 '방'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하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못해, 집단 기억이라는 이름으로도 형상화 할 수 있다. 그 '방'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네 통과 의례로서 거쳐가야 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김애란의 작품에서는 지속적으로 여러가지 방을 통해 그 사실을 짚는다. 독서실(<자오선이 지나갈 때>), 고시원(<기도>), 반지하 자취방(<도도한생활>). 이런 공간들은 청년들이 더 나은 삶으로 추동하는 과정 중에 거쳐가야 하는 공간으로서 묘사된다. 물론, 원하는 방향에 도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이다. 외롭고 고독한 공간이다.
이런 곳들을 우리는 통과의례 삼아서 지나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무리 상상력을 한계까지 시험하여도 '방'이라는 형태를 벗어날 수 없는 것만 같다. '방'이 이제는 통과의례로 기능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방'으로 전락해버린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현실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꿈마저도 '방'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발버둥쳐서 닿는 곳. 닿길 바라는 곳. 모든 희망회로가 긍정으로 답하여 기어코야 닿기를 바라는 곳. 한남더힐? 성수동 트리마제? 에테르노 청담? 이런 곳 마저도 사방과 위아래가 닫힌 '방'이라는 구조를 가진 물리적으로 폐쇠된 곳이다. 계급을 가리지 않고, 상승에의 욕망과 욕구가 '방'이라는 형태로 제한되고 거세된 것만 같다. 상술한 욕망의 아이콘과 같은 공간들이, 그저 크기가 조금 더 커진 '방'이기 때문이다. 욕망해 봤자 방. 상상력의 한계가 저렴해졌다.
그런 고로, 상상력의 한계는 위협받고 있다. 라고 말하면, 필요 이상으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인가받은 예언자"적인 말을 하고 싶은 것으로 보이겠지? 다시 Galvanized Steel로 돌아와서. 소우주를 개발할 상상력은 얻고 있지만, 유영할 우주의 크기는 한 없이 좁아지고야 마는 것인가. 세상이 빠르게 좁아지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