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레오의 세계>
24년 1월, 유지혜 작가의 <클레오의 세계> 씨네토크를 다녀와서,
내가 주인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기꺼이 양보하고 악의 없이 인정할 수 있는 것.
감당키 어려운 이별의 어린 눈물.
서로를 각자 삶의 궤적으로 놓아주는 소회의 눈물.
영화는 중간마다 애니메이션이 혼재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수채화, 혹은 유화 질감으로 표현된 애니메이션은 클레오가 내내 손에서 놓지 못하던 스케치북 속 작품이 아닐까. 클레오의 상상은 스케치북 속 삐뚤빼뚤한 그림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어른들이 설명해 주지 않는 부분까지 스스로 상상하고 공감한다는 것에 있다. 고작 6살짜리 아이가 말이다.
아무도 클레오에게 유모 글로리아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어째서 유모가 되었는지, 왜 파리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고향에서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럼에도 6살 남짓한 클레오는 스케치북에 그리듯 상상을 이어간다. 글로리아 어머니의 무덤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것도 이미 글로리아와 자신 간의 동질감을 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동시에 영화를 보며 나는 내가 클레오인 듯한 묘한 몰입을 경험했다.
클레오는 글로리아와 모성 관계를 능가하는 유대감을 형성하고, 유치한 질투를 하다 마지막엔 헐떡이는 숨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의 주체가 바로 나인 것만 같았다. 그 모든 감정선이 모두 내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자라오며 꽤 많은 어른과 깊은 유대감을 나눴다. 세어보면 손에 꼽히지만 그만큼 깊은 유대감을 나눈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흔치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주먹밥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어주던, 입술에 닿던 비닐장갑의 미끈거림.
날 언제고 업어주던 푹신하고 따스하던 등.
내 발을 꾹꾹 누르고 발가락 하나하나를 만지던 굳은살의 딱딱한 손.
볼에 닿으면 따갑던 뻣뻣한 머리카락.
내 다리를 이리저리 돌리던 가냘픈 손목.
모두 촉감이다. 촉감으로 기억난다.
클레오 역시 언젠가 시간이 지나 촉감으로 글로리아를 추억할 것이다.
또, 클레오를 통해 내 치부를 들킨 것도 같았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공격적이고 비굴하며 유치한 내 속의 작은 아이를.
그토록 낭만적인 방식으로 기억하는 그 사랑하던 이들에게 나는 부끄럽게도 엄격했으며 오만했다.
달의 뒷면처럼 내가 알지 못했던 그들의 삶을, 다른 모습을, 견디지 못했다.
감히 재단해 나름의 이상적 이미지를 만들고 확정해 버렸다.
그들에게서 나 이외의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오직 너뿐인데'라는 생각에서 오는 섭섭함에 휘둘려 먹이를 뺏긴 짐승처럼 굴었다.
큰 아이들이 놀던 절벽에서 아래로, 깊은 물로 떨어질 것이다.
화산폭발처럼 모든 잡다한 것을 태워버리고 싶다.
그리고 난 나의 글로리아가 아직도 필요하다.
보란 듯이 멋진 다이빙을 해내면, 다시 찾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