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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온유 Dec 16. 2024

미안해, 그 한마디의 용기

미안하다는 말은 누가 해야 할까요?

세 살 어린아이에게 물어봐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네, 잘못한 사람이요.”

그렇다면 미안하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대답은 같을까요? 정답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잘못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모두가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사과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사과할 행동 이후에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때린 사람은 쉽게 잊어도 맞은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한다’는 말처럼, 행위자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피해자는 그 상처를 평생 간직하게 됩니다. 특히 가족 간에 발생한 폭력은 더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함께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쇼핑을 하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져도 그것이 치유되거나 잊히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만 아무렇지 않은 척할 뿐입니다.     

내담자는 결혼 후 7년 동안 부부싸움 중 배우자로부터 폭언과 폭력을 일방적으로 당해왔습니다. 처음엔 신혼 시절 거실에 있던 공기청정기를 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이후로 리모컨, 숟가락, 손거울, 화장품 병… 화가 나면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는 행동이 이어졌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달라질까 기대했지만, 변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었을 뿐이었습니다. 내담자는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해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고, 결국 병원을 찾았습니다.

최근에는 배우자가 휴대전화를 던져 허벅지에 멍이 들었습니다. 급기야 얼굴을 때리는 데까지 이르렀고, 내담자는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다’는 생각에 여러 번 망설인 끝에 신고를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신고 후 경찰 앞에서 가해 배우자는 태연히 말했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저희 아내가 오래전부터 우울증 약을 먹고 있습니다. 환자예요. 별일도 아닌데 신고해서 귀찮게 해드렸네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내담자는 물리적 상처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이 사람이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고 있구나.’

그리고 가해 배우자는 짐을 싸서 아예 집을 나갔습니다.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내담자에게 보내놓고서 말입니다.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든 건 다 너 때문이야. 감히 신고해? 나 없어도 괜찮다는 거지? 어디 애 데리고 혼자 살아봐. 잘못했다고 싹싹 빌 때까지 내가 집에 들어오나 봐라. 생활비도 네가 다 알아서 해”      

맞아 멍들고 상처받은 사람은 내담자인데,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것도 내담자의 몫이라니요.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기 행동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히려 폭력적인 행동에 민감하고 화들짝 놀라며,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 가족입니다.

가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바뀌지 않습니다. 당연히 자기 행동에 미안한 마음이 생길 리도 없습니다.     

한 상담 중, 가해 행동을 해 왔던 내담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잘못했네요. 지금까지 다른 식구들 탓만 했지, 제 잘못을 알지도 못했네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말을 듣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피어났습니다. ‘잘못을 한 사람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어쩌면 이렇게 당연한 일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유치원에서 우리는 잘못했을 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이 단순한 진리를 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방어만 하는 태도는 약하고 비겁한 마음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직면하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내담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가해 배우자의 진심 어린 사과였습니다.

“사과로만 괜찮으시겠어요?”라는 질문에 내담자는 말했습니다.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요.”

저는 속으로는 외치고 싶었습니다. “사과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죠! 무릎 꿇고 진심으로 비는 건 기본이고, 이번 기회에 아주 혼을 내줘야 해요. 교육도 받고 상담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내담자의 마음을 존중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심이 담긴 사과가 있다면 그것이 회복의 시작이 될 거예요.”     

감사할 상황에서 감사할 줄 알고, 미안할 상황에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특히 가족 간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미안해”이 한마디가 어렵습니다. 하기 어렵고, 듣기는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한마디가 관계를 살릴 수도,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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