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나경이 떠나고 난 이후에 학교에 관심이 멀어졌다
8편 입대
수현은 3학년에 진학하지 않았다. 수현은 나경이 떠나고 난 이후에 학교에 관심이 멀어졌다. 3학년에 진학하지 않고 군대에 가기로 했다. 논산 훈련소로 떠나는 수현을 마지막까지 바래다준 것은 지숙이었다.
“선배 머리 깎으니까 진짜 군인 같은데요?”
지숙은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너 선배가 입대하는 것이 그렇게 좋냐?”
뭐. 어차피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선배 좋아하는 후배들도 많고 이제 만나지도 못하니까”
“저는 그게 더 좋은데요.”
“선배 너무 외로워하지 마세요.”
“제가 매주 편지 보낼게요.”
“전 왠지 선배에게 편지 쓸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좋은데요.”
“매일매일 제 편지 기다리면서 힘내세요.”
수현은 지숙의 그런 행동이 밉지 않았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이라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가는 것이 좋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더 이상 학교에 있으면 수현은 더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현이 생각한 학생운동과 직접 경험해본 학생운동과는 차이가 컸다.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수현은 통일운동만 하는 총학생회나 학생회가 맘에 들지 않았다. 통일이라니…. 북한은 북한대로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면 되고 남한은 근본 문제는 통일이 아니라 민주주의나 노동문제나 농민 문제에 있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논산 훈련소 신병교육대에 들어간 수현은 4주 훈련을 마치고 부산 69사단에 배치되었다. 나경과 함께 걷다가 본 그 부대였다.
2년 6개월의 군 생활은 수현에게 별다른 기억을 남기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사회에서 격리되어 자신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맘이 편해졌다.
복종의 즐거움인가? 수현의 고참이나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누구누구의 지시대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매번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군대 생활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주는 묘한 해방감에 익숙해졌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무력감과 함께 선택의 고민이 사라지는 해방감도 준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매주 수요일쯤 도착하는 지숙의 편지도 수현의 군 생활을 위로해 줬다.
편지는 별 내용이 없었다.
현재의 학교 상황 지숙의 생활 그리고 안부,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지만 매일 같은 일을 하는 수현에겐 편지가 오는 날에 대한 기대감과 제대할 날이 가까워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어주었다.
지숙은 매주 수현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을 즐겼다. 편지지를 고르는 일, 그리고 정성스럽게 글씨를 써가는 일이 지숙에게는 수현과 자신을 이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위의 반복이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이라고 지숙은 생각했다.
수현은 경계근무를 서는 날이면 바다를 보며 지숙과 나경에 대해 생각했다. 나경은 일본에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가? 도쿄의 생활은 어떤 것일까? 지숙은 또 어찌 보내는 것일까? 첫 휴가 때 만난 지숙은 예전과 별다르지 않았다.
강진의 문학 써클에 여전히 가입되어 있었지만 깊이 활동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강진은 여전히 집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강진은 벌써 3학년이 되었고 학내에서 신망 있는 선배가 되어 있었다. 수현은 여전히 세상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알 수 없었다.
그날 부대에 복귀하기 전날 밤 지숙과 수현은 함께 술을 마셨고 함께 여관에 갔다.
수현이 지숙의 몸을 만졌을 때 지숙은 수현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선배 나 사랑하지?”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새벽에 여관을 나와 콩나물국밥을 먹고 헤어졌다.
수현은 지숙과의 관계 이후에 지숙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경과 함께 밤을 지새운 날 수현은 나경을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련한 마음만큼은 보내지 못했다.
그날 밤 나경과 관계했다면 수현은 나경을 사랑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경과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경은 그날 밤 수현과 자신이 더 이상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아니 더 이상 만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경은 수현은 사랑했지만, 아버지가 도쿄에 가라고 할 때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래서 더는 수현과 자신이 더 깊은 관계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수현이 군대 있는 동안 지숙은 자주 면회를 왔다.
밥을 먹고 술을 먹고 여관에 가서 매번 두세 번 관계했다.
매일 같은 패턴이었고 지숙은 수현이 여전히 좋았다.
수현도 지숙이 좋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수현이 길고 긴 군 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했을 때 강진은 군대에 입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