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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맷 Jun 13. 2024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류 포터의 두 번째 단편집 『사라진 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유월 첫날 한강에 누워서 읽고 올 계획이었는데 첫 장부터 슬픈 감각이 가득한 글을 읽기에는 날씨가 너무 완벽했다. 여름은 대체로 이 계절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진저리 치는 걸 납득할 만큼 사납기 마련이지만 그날은 햇빛, 바람, 습도 모두가 적절해서 그런 초여름의 오후를 여름 대표로 하자고 하고 여름 대변인 하고 싶었다. 여름헤이터들에게 프레젠테이션 기회가 주어진다면 캔디컬러 수영장에 풍덩 빠지는 순간을 포착한 것 같은 <큰 첨벙 A Bigger Splash>(1967) 그림도 가지고 나가야지.


David Hockney, A Bigger Splash, 1967


사실 그 그림보다는 호크니가 비교적 최근에 아이패드로 그린 <여름 하늘 Summer Sky>(2008)을 더 좋아해. 전경의 붉은 길이 화면 깊숙한 곳에서 하늘과 만나서 여름날 어느 광장의 분수가 높게 솟아오르는 물줄기 같기도, 한 곳에 모여있던 구름이 사방으로 퍼지는 모양이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이미지로 그려낸 게 여름 에너지가 충만하게 느껴져서 마음에 든다.


David Hockney, Summer Sky, 2008


지난 토요일 피크닉은 저 그림만큼 좋았다. 풋살 같이 하는 친구들이 여럿 모여서 집에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랑 유부초밥, 과일이랑 과자를 잔뜩 늘어놓고 오래 먹었다. 나란히 누워서 각자 책 펴 들고 세 쪽 정도나 읽었나 그런 평화도 잠시 돗자리 펴놓은 그늘 앞에서 비눗방울을 번갈아서 불면서 깔깔대는 얼굴들도 어리고 귀여웠다. 청량한 하늘을 배경으로 웃기는 소리들을 하는 몇 초를 찍어둔 소란한 영상이 소중하게 간직될 예정.


어쨌든 그날 미처 못 읽었던 단편집 『사라진 것들』은 오늘에서야 서너 편 정도만 읽었는데 상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감정들, 익숙한 곳에서 낯섦을 느끼는 순간들, 길지 않은 인생의 어떤 시절을 공유했던 사람의 부재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첫 번째 책만큼이나 여전히 마음 아픈 글을 쓰고 있었다.


앤드류 포터의 첫 번째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부터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했는지, 그 과정에서 지금 깨닫게 되고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에 관한 열 편의 이야기들. 표제작과 가장 끝에 실린  「코네티컷」을 특히 좋아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연인에게 충실할 것으로 마음먹고 다른 종류의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사람을 저버렸던 여자의 이야기였고,  「코네티컷」은  사랑하는 여자애인을 둔 엄마를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던 어린 날의 회상기다. 이 책을 다룬 문학수업 때 내밀한 사랑의 필연적인 왜소함에 대해 발제문을 공들여 썼던 기억이 난다.


수록된 이야기들을 차치하고라도 그 책의 제목은 내 머릿속을 떠난 날이 없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양자전기역학 : 빛과 물질에 관한 이상한 이론 QED: The Strange Theory of Light and Matter』을 차용한 제목이다. 파인만은 낮에 램프를 켜놓고 보면 빛이 유리창 표면에서 부분적으로 반사된다고 말한다. 실험에 따르면 100개의 빛 입자 중 평균 4개의 입자는 반사되어 돌아오고 96개는 유리를 통과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빛 입자가 자신의 경로를 선택하는 과정을 알지 못하며, 특정 입자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을 겸허하게 만드는 이 이론은 결코 경로를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통찰하고 있어 소설 제목으로는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앤드류 포터 소설의 주인공들은 아주 작은 시행착오 같은 사건으로부터 변화를 겪고 어떻게든 성장해 온 나를 되돌아본다. 그리고는 한 시절과, 한 세계가 마감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먹먹한 슬픔을 느끼며 잠시 멈춰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아문 자국을 지닌 우리가 그렇듯이 그들도 계속해서 삶을 지속해 나갈 것을 안다. 서투르고 과오투성이인 '나'로부터 벗어났다 할지라도 성장은 어떤 종류이든 서글픈 것 같다. 내가 친애했던 문학 교수님도 성장의 비극적인 면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 성장이 비극적인 이유는 사랑의 원리가 폭력으로 대체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도화지에 누군가 검은 물감을 뿌리는 일을 보는 것도 괴롭지만 스스로 검은 물감을 뿌리고 찢는 일도 무척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죠."


성장이라는 게 스스로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되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검은 물감으로 덮은 듯 없음을 염두에 둔 말씀이었을까. 아마 어떤 문학작품의 주인공을 두고 한 코멘트였을 걸 두서없는 강의노트에서 발췌한 내용이라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사랑의 원리가 폭력으로 대체된다는 부분은 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 채로 남겨두고 싶기도 하다. 다만 성장이라는 말은 시간을 더해가며 부피가 늘거나 질이 개선된다는 의미로 쓰지만 한 인간의 성장이라고 할 때 소진되는 동력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긍정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12년 간 일주일씩 한 소년의 생활을 촬영해 만들어낸 영화 <보이후드 Boyhood>(2008)에 대해 이동진 평론가가 “그때 그 아이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라고 적은 것을 봤을 때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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