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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kaya Lee Nov 26. 2015

호두와 말린 무화과와 병아리콩과 시간의 가게



핸드폰 유심칩을 사지 않아, 한국에서 걸려올 전화 따위도 없고,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빵빵 터지는 인터넷의 혜택으로부터 애저녁에 멀어져 버렸으니...

온전히 굴러가는 시간 전체가 나만의 몫이었다.

TV도, 인터넷도 없는 생활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행길 아니고서야 어찌 이리도 온전히

하루 24시간 '군중 속의 섬' 같은 생활을 누려보겠는가 싶어 자초한 일이다.



지난 일요일, 우연히 이 골목을 찾았다가 굳게 문이 닫힌 가게 위치를

단단히 확인만 해두고는, 아쉽게 돌아섰던 기억.

오늘 다시, 이곳을 찾아 빠끔 문이 열린-

어두운 색조의 녹색 간판을 보았을 때, 나는 직감했다.

내가 이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마도 다시 빠져나올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것 같다......























살며시 문을 여니, 동굴로 들어선 것만큼이나

침침한 노란 조명등 아래

흡사 커피 원두 로스팅 작업장에 온 것만 같은

온갖 잡동사니며 묵직한 철제 기구들이

가게 이곳저곳에...... 아, 아니지,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기다란 구조의 가게 내부를 따라 일렬로 늘어선

마호가니 색 진열장 안에 빼곡한,

그야말로 온갖 곡물과 견과류와 향신료와

깡통들......의 향연.

색색의 과일 절임, 

그들이 담긴 유리병의 둔탁한 투명함,

빨간 철제 통 파프리카 가루들,

푸석푸석 마른 각종 허브와

몇 종의 구움과자들까지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따스한 기분. 생경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

온통 공간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수십 종의 예쁜 유리병 패키지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손때를 탔는지 가늠도 안 되는 나무 진열장들.

세상에나, 원목 진열대가 유리마냥 반짝반짝- 윤기를 머금고 있었다. 

바구니를 그득 채운 다양한 크기의 각종 너트들, 말린 무화과, 건포도, 

한 줌이나 될까말까 조심스레 담아 놓은 '고귀한' 사프란,

시럽에 담근 앵두, 이름 모를 베이지색 스프레드와 밤 크림......

가게 로고가 선명히 찍힌 크라프트  종이봉투......

시각적인 요소들보다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건,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좀체 경험하기 힘든 '후각적' 감흥이었다. 

이렇게나 켜켜이, 복합적이고 미묘한 냄새. 도저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 향수를 자극하고 과거의 기억을 일깨우는 힘을 가진 매개체들의 응집.





































누군가가 휘휘, 손짓을 했다.
















- 안녕, 잠깐 이쪽으로 와 봐. 보여줄 게 있어.

나는 여기 매니저이고, 지금은 아몬드를 볶고 있어. 늘 일일이 볶으면서

적당한 타이밍에 불을 끄는 게 중요하지-

나는 이곳에서 판매하는 다양한 제품들을 골고루 다 직접 관리하고 있어.  

지금 이 아몬드는 조금 덜 볶아졌네. 조금만 더 볶으면 훨씬 더 풍미가 좋아질 거야.

- 아 정말... 난 이런 게 너무 좋더라구요!!!

이렇게 아직까지 직접 나무를 때고, 손때가 잔뜩 묻어있고 번거롭지만 보람찬 이런 작업들요.

- 까다롭고, 늘 쉽지는 않은 작업들이지만,

오랜 시간을 들이면, 분명 그만큼의 가치가 있지...

-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무척 공감해요.

나는 오랜 시간을 견뎌낸 것들과,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운영하는 장소들을

동경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빠르고 편리한 것들에 익숙해져 버렸지만, 최소한 나는 아직도,

이런 쉽지 않은 작업들을 좋아합니다.

- 그래, 너는, 음,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보이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두터운 철판을 뚫고 화덕 밖으로 새어나오면서

뿜어내는 열기가, 고소하고도 경쾌했다.    

고구마가 익어가는 듯한 탄내가 소올솔 퍼져나가자, 난롯가에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는

오두막집 꼬마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몸을 감쌌다.
































이런 곳에서 매일같이 자신이 만족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삶은 어떨까? 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내어 묻지는 않았다. 삶의 무게는 결국, 어디에서나 동일한 것이므로.

여행자의 진부하고 철없는 감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한 말을,

굳이 꺼내어 보이고 싶지가 않다.

우리의 대화는 그쯤에서 끝이 났고, 그는 다시 자신의 일을 하러 멀어져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게 안 구석구석을 빙빙 맴돌다가

마침내 이곳을 나서야 할 시간이 온 것을 깨닫고는... 그냥 떠나기가 못내 아쉬워

찬장 여기저기, 바구니 안 담긴 것들을 기웃거리며 살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그곳에서 사온 땅콩은, 정말이지 깊은 맛이 났다.

깊다기보다는, 굉장히 복합적이고 '풍부한' 맛이 났다. 적당히 잘 볶아져 오도독,

경쾌한 식감과 함께 입 안에서 확 퍼지는 기름진 너트류의 풍미와

커피 원두를 함께 볶아낸 것만 같은 스모키한 향기, 맛. 땅콩 하나만의 맛이 아니라

그곳의 아몬드와 콩과 호두와 건포도와 고추 내음이......

일시에 하나의 연기로 화해 땅콩 속으로 녹아든 듯했다.

후회했다. 이렇게나 맛있을 줄 알았다면, 가방이 좀 무거워지더라도 큰 봉지에 가득 담아 오는 건데!!! 

시간을 지켜낸 것들을, 시간과 함께 해온 것들이

아직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어 좋다. 

나보다 더 오래오래, 그런 곳들이 전설처럼 존재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간판 위 고풍스러운 금색 글자보다 더,

반짝이고 빛을 내던,

매니저의 눈빛과 색색의 병들.



다시금 뛰쳐나온 사바세계의 골목길은,

뜨거운 한낮의 태양빛에 눈이 부셨다.

목이 말랐다.

천천히 문 앞을 떠나,

또 다른 피안의 세계를 찾으러,

좁은 골목길을 돌아선다.

언제 다시, 이곳에서

나무 장작 타는 냄새를

맡아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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