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최근 비평집을 통해 아주 인상적인 소설의 일부분을 접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것에서 오는 자산성 행복과 순간순간을 느끼는 현금흐름성 행복으로 행복의 형태를 두 종류로 나눠 설명한 단락이다. 이를 통해 나는 여태껏 어떤 행복을 추구해왔는지 현재 나의 행복 자산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자산성 행복을 추구했던 시간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20대 때의 나는 절대적으로 ‘자산성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했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험난한 과정 또한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도 충만했다. 절대적인 자산성 행복 추구는 창문 없는 1평짜리 고시원의 생활도, 자발적인 새벽 출근과 주말 출근도 힘겹지 않게 버틸 수 있게 만들어줬다.(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한다.) 그렇게 높은 행복 자산의 이자로 약 4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성취감이 줄어들었다. 성취는 중독과 같다. 한 번 성취하면 또 다른 형태 또는 더 높은 형태의 성취를 갈구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감각과 같은 성취는 육체적인 체력도 함께 동반해야 한다. 체력이 받쳐줘야 성취든 뭐든 건강한 자신만의 속도로 꾸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자산성 행복만을 추구해오던 나는 체력적으로 바닥이 났고, 이는 나의 정신적인 체력 모두 다 끌어내려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신적 육체적 체력이 모두 바닥난 과거의 나는 대책 없이 무계획 퇴사를 결정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았던 시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무런 계획 없이 보냈던 퇴사 후 4개월이 나에게 큰 터닝포인트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사실 당시에 내가 느꼈던 허무함과 막막함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추구하지 않았던 이 애매한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 하나가 있다.
4년간 자산성 행복을 집착하듯 추구한 내가 4개월간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나는 그간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행복의 ‘이자’로만 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 자산성, 현금흐름성 행복을 함께 추구했던 시간
그리고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이 지금의 행복’도 함께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그 다짐 덕분이었을까? 2018년의 나는 내가 봐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 운명처럼 와디즈에 입사하게 되었고, 자산성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현금흐름성 행복도 놓치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지이님 진짜 행복해 보여요!’였다.
특히 이전 회사에서 나의 직속 상사였던 한 과장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지이님 그전에 진짜 무서웠던 거 알아요? 건들면 터질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진심으로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행복의 이자로만 살아가던 때에 스스로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몰입했을지언정 함께 일하는 동료들 눈에는 그저 독기 품은 무서운 사람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하지만 사람의 습성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을 함께 추구해오던 나는 어느새 바쁘다는 핑계로 현금흐름성 행복을 누리는 감각을 서서히 잊어가게 된다. 현금흐름성 행복에서 무감각의 영역으로 그리고 자산성 행복 추구에서 무기력의 영역으로 전환되는 패턴은 다시 반복된다. 이래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말하나 보다. 살면서 가장 큰 무기력함을 느꼈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상황을 맞이했다.
- 실수는 반복했지만 선택은 달리했다
20대에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무작성 무계획 퇴사’를 선택했다면, 30대의 나는 ‘운동과 새벽 기상’을 선택했다. 그렇게 다시 삶의 활기를 되찾았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는 더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서 본래의 내 인생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무계획 퇴사’를 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현재,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학습능력이 꽤 좋은 사람이다. 자산성 행복, 현금흐름성 행복의 추구 그리고 무기력과 무감각의 반복된 경험을 배움 삼아 퇴사 후 지난 2년간 나에게 맞는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의 비율을 조절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나에게 맞는 행복 비율을 조절하며 또 한 번 깨달은 것이 있다.
- 현금흐름성 행복의 반전
현금흐름성 행복은 순간의 감각을 느끼는 찰나의 행복들이다. ‘순간’이라는 속성 때문에 저장이 어려워 자산으로 축적되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기록이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행복한 순간의 감각들을 ‘기록’으로 저장해두면 그 순간들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축적된 물증(?)들을 보며 ‘성취감’에서 오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즉, 현금흐름성 행복이 때로는 자산성 행복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현금흐름성 행복에서 자산성 행복으로 전환된 행복들은 일을 통해 얻는 성취감만큼 극적이고, 가늠되는 크기가 크진 않다. 오히려 은은하고 조용하지만, 지속적이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다가와 나의 일상을 버팀목처럼 지켜주고 있었다. 은은하게 다가온 순간의 축적된 감각들은 내가 더 큰 자산성 행복을 쌓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기력과 무감각을 반복하지 않도록 외유내강의 모습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 부자로 산다는 것?
만약 남극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파블로를 잡아다 헬리콥터에 태워서 하와이에 내려다 줬다면... 파블로는 그래도 행복했을까?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 누가 헬리콥터를 태워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 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자기 힘으로 힘겹게 바다를 건너온 펭귄이, 만약 그 과정에서 서핑을 타고 파도를 즐기면서 바다를 건너왔다면? 얼음배를 타고 모험하듯이 바다를 건너왔다면? 자산성 행복의 이자와 현금흐름성 행복의 금리를 함께 누린 셈이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고 싶다.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를 즐기면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을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것, 자기 인생에서 ‘부자’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