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ㅤ
야간작업을 마치고 세면대 거울에 비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손끝으로 턱선을 훑곤 까슬해진 수염을 쓸어내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원이는 애인이 있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새벽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대화에서 네 애인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작업복엔 나무 조각들이 붙어 있지만 털지 않는다.
그러면 네가 왜 이렇게 오빠는 칠칠하지 못하냐며 하나하나 떼어주겠지.
그래서 그대로 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원이와 만나기로 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너무 가벼워서 그만 계단에서 삐끗할 뻔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그 후유증 때문인지, 그전부터였는지 알 수 없다.
담배 연기의 매캐한 냄새가 느껴지면 원이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담배 냄새는 잠시도 맡기 싫은데 네가 피우는 비스타의 향은 왜 이렇게 달게 느껴질까.
코앞까지 왔는데도 원이는 비흡연자 앞에서 연기를 내뿜는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다.
연기가 뜨겁게 감싸는데도 불쾌함보다 네 숨결이 닿는 느낌이 든다.
네가 담배를 다 피우길 기둥에 기대어 기다렸다. 정적이 흘렀고 우린 눈을 마주쳤다.
지그시 보는 그 눈의 속눈썹이 꽤 섹시하게 느껴졌고 괜히 민망해져서 네 손마디 사이 피어오르는 연기로 시선을 돌렸다.
꽁초를 바닥에 탈탈 털어내며 다가온다.
왔냐는 말과 함께, 원이의 두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흡연자의 치아는 누렇다던데 넌 왜 이렇게 하얀 거지.
무심결에 치약을 뭐 쓰냐고 묻자 급하게 입술을 앙다무는데, 아까는 분명 반쯤 감은 사슴의 눈이었다가 지금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마치 꽁꽁 숨겨둔 홍당무를 들킨 토끼처럼.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꾹 참고 치야가 하얗다 말해줬다.
원이는 금방 배시시 웃으며 오빠도 나처럼 좀 하얘 보라며 깐족거린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루틴처럼 서로의 작업이 끝나면 주차장에서 만나, 차를 끌고 좀 떨어진 공원으로 향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만남이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려서.
차는 항상 내 애마…. 풀 할부 때린 중고차로 여정을 떠난다.
내 손 때가 묻은 작은 물건들과 좌석 시트에 방석 대신 깔린 인디언풍 머플러, 절 향이 은은하게 남아있는 종이 방향제, 작업하고 벗은 옷, 널브러져 있어 보이지만 나름 질서 있는 공구들.
온통 내 것의 공간에 내 것이 아닌 원이가 제일 친밀한 좌석, 조수석에 탄다.
첫 차이기도 하고 손 세차로 관리하다 보니 뭔 놈의 애정이 붙어버려서 친구들도 한 번 태워본 적이 없다.
사실 내가 차가 있다는 것도 알려준 적이 없으니 애들은 잘 알지도 못한다.
근데 원이에겐 내 입으로 술술 불었다.
원이는 작업 끝나고 집 갈 때 운행하는 버스가 없어서 30분 정도 걸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바로 ‘나 차 있는데 중간에 내려줄게. ‘라고 내뱉었다.
처음엔 후배의 밤길이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되뇌며 내 안에 영문모를 죄책감을 도닥인다.
하지만 난 유교 보이고, 내가 원이의 남자친구였다면 기분이 나빠서 그놈의 명치를 세게 때리는 상상을 한다.
이게 옳지 않다는 건 나도 안다.
아니 옳은 게 뭔데?
내가 원이를 좋아하는 티를 냈나?
아니잖아.
아니, 애초에 내가 좋아한다는 감정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복학하고 친구도 없고 그러다 보니 제일 편한 사람이 원이가 됐다. 단지 원이가 이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편해할 필요 없잖아.
얘의 남자친구도 나의 존재를 모를 거고 원이도 내 행동에 꺼림칙함을 느끼지 않으니까 지금 내 옆에 앉는 거겠지.
나도 선을 지킬 줄 안다.
.. 지금 이 생각이 오히려 과한 거다.
작업을 하다 보면 길고 고된 시간 집중을 하게 돼서 끝나면 항상 배가 고팠다.
차를 끌고 공원에 가기 전 편의점이나 드라이브스루가 있는 버거킹을 가는데, 원이를 보니 오늘은 버거킹이다.
배고프다고 배를 쓰담쓰담 거리는 행동은 만 7살 사촌 동생에게만 봐왔는데 스물둘 먹은 여성이 저 행동을 하다니.
귀여웠다.
그 애는 행동 하나하나가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어울린다.
지금 네가 내 옷을 정리하는 것도..
와퍼에 피클 빼고 콜라는 제로로.
너를 잘 알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어서 묻지도 않고 메뉴를 골랐다.
원이는 ‘오~’ 영혼 빠진 외마디만 외치곤 알림이 울린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남자친구겠지.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음악에 맞춰 핸들을 두드리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플레이리스트에 너의 취향이 묻었다.
그래서 지금 나오는 노래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네 앞이니 비트를 타본다.
국힙이 싫어진 지 꽤 됐는데 원이가 오카시는 다르다고 했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도 같다.
전엔 원이가 작업하고 운전하면 졸리지 않냐며 내 차에 들이기도 싫은 비주얼의 졸음 뚝! 껌을 사줬었다.
나는 민트향이 진하게 나는 게 싫어서 치약도 레몬바질 향을 쓰는데 그 매운 껌을 컵홀더에 꽂아놓았다.
받은 건데 버리기도 좀 그래서 매일 한두 개씩 억지로라도 먹었고, 얼마 안 가서 빈 통.
그냥 운전하려니까 입이 심심해서 이젠 내 손으로 직접 그 껌을 사기까지 한다.
뭐지.
너무 자연스럽다. 이 상황.
언제부터 이렇게 내 일상, 내 인생에 침투한 거지?
위화감이 들던 순간 원이가 한숨을 크게 내쉰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마음 같지가 않네.”
응. 남자친구랑 다툰 게 틀림없다.
말해주지 않을 게 뻔하니 마침 주문한 음식도 나왔고, 이걸로 이야기 주제를 바꿔야지.
“자, 받고. 답답하면 창문 열어줄게.”
“응! 열어줘.”
창문을 내리고, 액셀을 밟았다.
원이는 생각보다 단순해서 이런 작은 일에도 쉽게 신이 난다.
그리고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원의 손이 머리끈으로 갔다.
질끈 묶인 머리를 단번에 풀어내더니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두 손엔 버거와 콜라를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었고 쏟아질까 걱정됐지만
나는 지금의 원이를 막고 싶지 않았다.
나와 원이 사이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가림막이 있었다.
나는 그걸 지키려 나름 조심스럽게 굴었지만 원이의 머리카락이 바람 타고 날아와 내 뺨을 스치는 순간,
그 얇은 막은 단숨에 뚫렸다.
원이의 얼굴이 창밖으로 더 깊숙이 빠져나갔고 바람을 한껏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웃는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원이가 바람 속에서 자유로워 보일수록 나는 더 깊숙이 묶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나는 거기까지였다.
ㅤ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