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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말 Jul 08. 2024

이런 순진 무지한 견주를 봤나

누리와의 첫만남 - 이천십삼 년 구월의 이야기

열어 놓은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자 무더운 여름을 보냈다는 기분을 만끽하려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멀리 나지막하게 일어났다가 사그라지는 파도를 보며 어느 바닷가 소나무 숲에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하며. 

 

그런 와중에도 나의 눈길은 사무실 가운데 전자시계로 옮겨갔다 책상 모니터로 다시 돌아오는 매우 유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고갯짓을 반복했다. 이렇게 시간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정확히 1시간 후 우리 가족의 첫 반려견 골든리트리버 누리가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올해 고2에 접어든 딸은 몇 달 전부터 강아지 노래를 불렀다. 요즘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어버린 “나만 강아지 안 키워!”라는 말을 아침 눈뜨면서 잠이 들 때까지 부르며 괴롭힌 탓에 나는 거의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갈 무렵 딸의 집요함에 백기를 든 나는 몇 날 며칠 분양 과정과 건강 상태를 확인한 후 펫샵을 통해 누리를 입양하기로 했다. 


사실 꼼꼼히 알아본다고 했지만 우리는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대부분 맹신하다시피 했고, 버스에 누리를 태워 보내겠다는 샵 사장님의 말에도 순진 무지한 말투로 “알겠다”라고 답했다. 막상 누리를 발견하자 태어난 지 두 달을 막 넘긴 아기 강아지가 혼자 버스를 타고 왔다는 사실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갈피를 못 잡는 시선을 붙들어 버스기사님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터미널을 빠져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반려견을 이미 키우고 있거나 좋아하는 동료. 또 목이 빠지게 보고 싶다고 격하게 표현해 주는 동료를 위해

(그래야 내일 사무실에 평화가 찾아올 테니) 조퇴를 했음에도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도착하자마자 몇몇 직원들의 환호 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어리둥절함 같은 건 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무실 바닥에 쉬야를 해버리는 누리다. 일 년 넘게 근무하면서 직원들한테 환호를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누리는 만난 지 일 분도 안 돼 이런 환대를 받다니, 역시 귀여움이란 인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필살기임이 틀림없다.  


그 후 입양이 결정된 가족회의에서 딸아이가 약속했던, 아이들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할 때 대부분이 하는 거짓말. “내가 똥도 치우고 목욕도 시키고 다 할 거야!”라는 말에 속았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 가까이 잠을 설칠 정도로 낑낑거리는 통에 피곤한 상태로 출근을 하고 배변 적응을 시키느라 집안이 쓰레기장이 되어도 딸은 학교 가기 바빴고 끝나면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기 바빴다. 누리를 자랑하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생각해 보면 딸아이에게는 그닥 자랑거리가 많지 않았다. 이혼가정에, 오래된 십칠 평 아파트에서 엄마와 오빠 세 식구가 풍족함과 적당히 거리를 둔 채,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껏 파악하고 행동해야 하는 조금은 주눅 든 삶이었을 테니까.  

 

다행인지 몰라도 오빠가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곧 자기 방이 생길 거라는 기대 속에서 누리의 존재는 때때로 어둑어둑해지는 마음을 비출 수 있는, 무엇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 줄 것 같은,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무한하고 끊임없는 기쁨과 사랑을 표현해 주는 믿음의 존재로 다가왔으려나. 딸아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넉넉하지 않아도, 좁은 집에 살아도 그런 것쯤은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신기하게도 누리를 향한 딸아이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 집안 온기가 달라졌다. 따뜻했던 가족의 냄새는 한참을 더듬거려도 코끝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는데 이제는 행복했던 추억과 부둥켜안고 슬퍼하는 게 아니라 반갑다고 인사를 나눌 정도의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누리 덕분이다. 


자신감이 과도했던 것일까. 평소라면, 누리가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면 꿈도 꾸지 않았을 일을 결정하고 만다. 누리가 오고 난 후 두 달이 안 돼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 중 하나를 고른다면 마음먹은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는 것인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누리와 우리를 위한 더 나은 환경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어디서 생겼는지 며칠 고민할 새도 없이 계약을 해치웠다. 

   

이사한 집에서의 풍경은 유년시절의 한 때처럼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시원한 하늘을 더 푸르고 높게 보여주었고, 고개를 한껏 젖혀야 우듬지까지 볼 수 있는 느티나무와 벚나무, 아카시아나무 길을 어느 때고 걸을 수 있었다. 이 새 저 새가 혼합 중창으로 모닝콜 연주를 선보이고, 커다란 종이배를 띄우고 안온하게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싶은 강이 가까운 집이었다. 


그렇게 시월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누리와 함께 우리 가족은 새 둥지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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