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티를 완성한 이후 쭉쭉 뻗어 나가야 할 진도가 한동안 멈췄었다. 내용도 다 정해졌고, 피드백도 받았는데 그 이후로 잠시 의욕 스위치가 꺼진 날들이 이어졌다. 보기만 하면 막막한 건 너무 익숙한 일이었고, 그럴 때 나름의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멈춰버려서 꺼내보지도 않게 되었다.
처음엔 책꽂이에 노트를 꽂아두었었다. 그랬더니 책상에 앉을 때마다 부담이 되고, 다른 일을 할 때도 신경이 쓰였다. 가지고 다니면 조금이라도 하게 될까 싶어 가방에 넣어뒀더니 가방 속에서 잊혔다. 되려 가방 속에서 발견될 때 못 본 체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예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니고, 매주 주간 계획을 세울 때마다 한 줄, 자리를 내주기는 했었다. 심지어는 일간 계획을 쓸 때도 ‘오늘은 여유가 있으니 좀 진행해야지.’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나면 도통 생각이 나질 않고, 생각이 겨우 들락 말락 하면 내가 밀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예 잊고 지내지도, 해내지도 않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14일이 지났다. 한 2주 정도가 지나고, 주간 계획을 세 번째쯤 새로 쓸 때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렇게까지 미룰 일인가? 하물며 그때는 일이 평소보다 많지도 않을 때였다. 이 정도면 왜 자꾸 미루는지 이유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또 이상한 압박감을 만들어내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날, 아예 시간을 내어 혼자 대화하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글쓰기는 최고의 자아 성찰 도구라고 들었다. 내 마음속 이야기들을 꺼내다 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았다.
예상대로였다. 귀찮고 재미없다고 시작한 이야기는 점차 부담감 때문이라는 걸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술술 쏟아져나왔다. 잘하고 싶고, 그래서 점점 미루고 있다는 뻔한 말이었다. 고질병이었다. 한 번 미뤄지기 시작하면 미뤄진 만큼 더 잘 해야 할 것 같아진다. 미룸굴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또 이거야? 스스로를 달랬다. 그냥 하자. 우리 최대한 쉽게 하자. 자꾸 더 잘해야 할 것 같아지니까 아예 시작을 못 하잖아. 이제 인스타툰은 조금 익숙해졌으니, 인스타툰으로 그려보는 건 어때? 종이 크기로 하지 말고, 가장 기본 크기로. 컬러가 부담스러우면 흑백으로 해도 괜찮아. 그냥 혼자 그리는 그림이잖아.
한참을 계속 써 내려간 후 잠시 메모장을 들여다보았다. 불만 토로의 장이었던 메모장이 뒤로 갈수록 점차 그냥 하자는 말로 채워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계속 달랜 끝에, 결과물의 목표 퀄리티는 최대 20%로 조정되었다. 그제야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창을 닫을 수 있었다.
너무 초보에겐 선언하기도 부담이 될 수 있고, 프로그램을 다녀오는 것도 압박감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나는 입문자인데, 사람들에게 하겠다고 선언을 해 버리니 부담이 되었나 보다. 그 와중에 잘 해보고 싶어 프로그램까지 다녀왔으니 더 긴장되고 압박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다시 20%를 목표로 하겠다고 선언해야 하는 건가? 이건 선언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밑밥 깔기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무렴 좋다. 밑밥이든 뭐든 이제야 마음이 가벼워지고 행동 에너지가 생겼다.
모두 기대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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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대 안 하셨다면 부끄러우니 그냥 넘어가주세요.)
10월 초에 작가의 참견 프로그램에 다녀온 후,
잠시 꺼져버린 제 의욕을 올리는 데 무려 3주가 걸렸습니다.
왜 쓰인 대로 2주가 아니냐고요…? 그건 또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그래도 다행히, 11월인 지금은 진행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해 나가고 있어요.
다행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