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한 고교생들의 아름다운 성장기
어린 시절 만화책을 읽는 것이 삶의 낙의 전부였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책 대여점에서 몇백 원을 내면 만화책 한 권을 빌릴 수 있었던 그때였다.
아마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신간은 300원, 구간은 200원에서 100원에도 대여를 해줬으니 천원 정도만 가져가면 한 이틀 정도는 환상에 나라에 푹 빠질 수 있는 말 그대로 천 원의 행복이 아니었나 싶다.
여타 남자아이들의 취향이 그렇듯 나 역시도 갑옷과 검을 휘두르는 판타지 만화 혹은 초능력을 가진 초인들이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룬 만화를 쉽게 집어 들곤 했는데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심심한 표지의 한 만화책을 집어 들게 되니 바로 그 만화책이 '아다치 미츠루의 H2'였다.
어린 시절엔 한편의 야구만화로
성인에겐 한편의 문학으로
내용을 대충 훑어보니 야구만화였다. 어려서부터 스포츠 관전에 흥미가 전혀 없던 나에겐 야구만화라는 것은 정말 안될 말이었지만, 그림체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에 결국 H2를 읽기 시작하게 된다.
슈퍼히어로들이 날아다니는 만화가 있는데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만화를 고르다니 얼마나 심심할지 감도 오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과감한 장르적 도전을 한 과거의 나에게 갈채를 보낸다.
역시나 펴는 순간부터 나를 환상의 나라로 보내주던 그간의 만화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 만화는 말 그대로 만화적인 과장된 표현이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 따위는 담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저자극이라 느꼈던 당시의 나는 그저 본작의 주 무대인 고시엔에서 주인공이 우승하기를 응원하면서 승패에 중점을 둔 1차원적인 감상을 해나가면서도 억지로 상황을 부추기고 과장시키지 않아도 아름다운 연출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알게 모르게 눈을 뜨게 된다.
그 후 H2를 다시 접하게 된 것은 약 15년 이상이 지난 시점에서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완결까지 나와있던 상태였고 문득 완결이 궁금해진 나는 이 작품을 1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엔 한편의 문학이 있었다.
야구라는 그릇에 담긴 사랑, 열정
그리고 계절
총 34권으로 구성된 H2를 3번 정도는 읽은 것 같다. 야구라는 그릇 안에 담긴 본론들이 뭔지 보이기 시작할 무렵 H2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다가온다.
사실 본작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청소년들이기에 청소년 만화로 느껴질 수 있지만 작중에 등장하는 디테일들과 감성을 캐치하고 느껴내기 위해서는 꽤나 원숙함을 필요로 한다는 함정이 있다.
그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가진 감정들을 쉽게 표면화하지 않는 데 있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절제하고, 뜨거운 열정은 냉정하게 조절할 줄 알며 내용 전반을 결코 무리해서 흥분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다운 계절의 흐름 속에 표현하므로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애석함과 실제로 겪지 않은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마저 선사한다.
고급스러운 절제는
무한한 표현력으로
아다치 미츠루 스타일의 가장 큰 매력은 담백한 절제로 마감된 매듭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절제라는 것은 시원스레 다 보여주기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독자가 원하는 만큼의 감정을 담을 수 있게 감성을 제한하지 않고 충분한 여백을 제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작중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는 슬픈 대목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오열하거나 슬픔을 구체적인 대사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을 떠난 이의 웃고 있는 사진을 무심히 보여주고, 다음 컷에는 속마음의 알 수 없이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얼굴들, 무더위 속에 울어대는 매미들, 바람결에 나무들이 흔들리는 들판 등을 차례로 보여주며 아무리 슬픈 일이 일어나도 세상은 그대로라고 말한다.
느끼는 만큼의 숫자를 적고 슬퍼하라는 이런 백지수표 같은 연출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며, 사람에 따라선 이건 꽤나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이런 방식 참 매력적이다.
총평
전작들을 거치며 형성된 특유의 아다치 미츠루 스타일의 완성이자 정수.
때론 포기하고, 때론 무리하고, 사랑과 슬픔을 알아보고 대하는 법을 배우는 아름다운 성장기를 그려낸 작품.
지나치게 조숙한 이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