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하 Jun 03. 2024

이루지 못해도 행복한 꿈

내가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나는 스포츠 중에 야구를 굉장히 좋아한다.

주위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내가 얼마나 야구 광인지도 알고 있다. 초등학생 때는 별명이 야구돌이었고, 야구 유니폼을 위아래로 갖춰 입고서 책가방에는 글러브 두 개, 단단한 하드볼 하나, 말랑말랑한 소프트볼 하나씩에 배트까지 야무지게 꽃아 들고 학교에 다녔었다.

좋아하는 프로야구단은 기아 타이거즈이다.

전라도가 고향이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연고지가 광주인 타이거즈의 경기를 어릴 적부터 보고 응원해 왔다. 우리 집은 경기도 양평에 있었고,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야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잠실종합운동장으로 가야 했다. 아버지의 일정 때문에 자주 가지는 못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에 갔다. 아버지가 "표를 구했는데 다음 주에 야구장 갈까?"라고 하시는 날이 내 행복감이 최고치에 다다르는 날이었다. 설레는 마음이 프린트된 티켓을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두고 날짜를 세기 시작한다.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하고 말이다.

어릴 적 나는 에너지가 밖으로 새는 아이였던 것 같다. 왠지 모르게 항상 목소리 톤이 격양되어 있고 부산스러우며 말 수도 굉장히 많았다. 어떤 일이던 앞장서는 일도 좋아하고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뭐든지 잘해 보이고 싶어 하는 아이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때문에 항상 팔불출인 나를 아니꼽게 보는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항상 야구 장비를 가지고 다니며 앞장서는 나로 인해 친구들 모두 야구를 즐겨했다. 동네에 리틀야구단에 입단해 친구들 앞에서 정식 선수가 된 듯 어깨를 으쓱해하기도 했다.

우리 집이 있는 양평군 서종면과 야구장이 있는 강상면과는 차로 30분~40분이나 가야 한다. 땅덩어리가 큰 탓에 같은 양평군 관내이지만 꽤 많은 시간을 이동에 써야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자연스레 야구선수를 꿈꿨던 나는 취미로 운동하는 주말반이 아닌 매일매일 훈련하는 리틀야구단 선수반에 가입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아들이 좋아하고 하고 싶다고 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밀어주셨던 두 분이시기에 이동 거리를 고려해 집을 이사하고 전학 가게 될 새 학교를 알아봐 주시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종초등학교 정배분교라는 곳이었다. 전교생이 100명도 채 되지 않고, 한 학년에 한 반으로 학급 인원이 8~9명, 많게는 13~14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 학교였다. 여름엔 눈을 뜨자마자 계곡으로 달려가고 가을엔 자라난 벼에 붙어있는 메뚜기를 잡아 튀겨 먹기도 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정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런 정겨운 곳을 뒤로하고 이사와 전학을 감행하는 건 꽤 두렵기도 했을 테지만, 그때 나에겐 오로지 야구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오래 걸릴 결정도 아니었다.

본격적인 10대의 야구 인생이 시작되었고 매일 야구를 위해 살았다. 학교를 마치면 매일같이 나가 훈련을 하고, 전국대회에도 나가며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어떤 일 때문이었을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슬슬 중학교 진학도 고민해야 할 시기에 다다랐다. 여태껏 당연하게 지니고 있던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에 의심도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넘어 성인이 될 때까지 이렇게 운동만 하고 살 수 있을까? 하며 인생 첫 고민과 불안함에 정착하게 되었다.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당시엔 코치나 감독에게 얻어맞는 일도 당연하듯 있었다.

평일 훈련엔 참관하는 학부모가 거의 없다. 특히 겨울방학 때 전지훈련을 하러 지방으로 내려가면 감독과 코치를 제외하고 동행하는 어른이 없었다.

보는 눈이 없어져서 그런가? 원래 전지훈련이 이런 것인가? 무거운 장비를 나르고 훈련장에 도착하면 우리는 뛴다. 평균 나이 11~12세 유소년 아이들은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6~7시간을 쉬지 않고 뛰었다. 감독은 저 멀리 다른 감독과 줄 담배를 태우며 웃고 떠들고 있다. '언제쯤 달리기를 끝내줄까...?' 하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뛰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이 되면 연습경기를 한다. 작은 실수나 실책이 나오기라도 하면 우린 맞는다. 경기 중인데도 불구하고 잠시 중단을 시키고 모두 집합해 한 명씩 엎드려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는다. 내가 서있는 위치로 공이 날아오면 멋지게 잡아 아웃시키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이젠 맞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실수 없이 성공시켜야 한다. 곧이어 몇 개의 실수들이 더 나오고, 그냥 넘어가는 게 없다. 우린 맞고 또 맞는다. 운동선수로 크려면 적당히 맞기도 하고, 바른생활과 강한 멘털을 위해 군기도 잡혀있어야 한다. 그때의 나는 감독의 애석한 방망이질을 딱 그쯤으로 해석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뛰고, 수도 없이 맞았다. 감독과 코치에게 들은 쌍욕을 셀 수도 없고, 엉덩이와 허벅지엔 붉고 푸른 멍들이 들어있었다. 더 이상 맞고 싶지 않았고, 가장 사랑하던 일에 대한 모든 정이 다 떨어져 있었다. 나름 머리가 굵어진 뒤 알게 된 내용이지만 감독과 학부모들 사이에 소위 정치질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 부모님과 정말 친한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집에 손님이 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감독은 가끔 왔었다. 부모님이 직장에서 회식을 하셔 술을 드시거나 늦게 귀가하시는 일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야구단 회식엔 참여하셨다. 단지 학부모들끼리도 잘 지내는 화목한 팀 분위기를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집에 초대를 하는 일이나 회식. 내키지 않으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들놈 때문에 감독과 학부모들과 잘 지내려고 애쓰시는 부모님. 그땐 왜 그랬는지 너무 늦게 알게 되고는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당연 나보다 성숙하고 지혜로우실 분들이지만, 부디 지난 건 지난 일로 가볍게 여기셨으면 좋겠다.

머지않아 내 일상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정든 친구들이 있던 이전의 학교로 재전학을 갔다. 원래 살던 동네로 다시 이사를 가고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다. 미련은 없지만 꽤 허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방과 후 학원이나 과외를 가는 친구들과 달리 난 할 일이 없었다. 단순히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 집에서 노래를 듣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고, 적적한 마음에 야구 방망이를 들고나가 1시간 정도 냅다 휘두르며 시간을 보내는 일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체감도 못할 때쯤 새로운 이벤트가 생겼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직접 야구단을 만든다고 하셨다.

의아했다. 선수 출신도 아닌 아버지가 감독을 하신다니. 게다가 일도 바쁘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 야구를 배웠고 사회인야구에서 야구 실력은 뽐내는 아버지를 봐왔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야구 사랑과 야구 열정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이미 눈에 불이 붙어버리신 아버지를 봤고, 선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지도자를 해야 한다는 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도 않게 느껴졌다. 어느 누구나 참여해 운동하는 '즐거운 야구'를 추구하는 아버지 신념 하에 팀이 생겼다. 주위에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 경험이 없어도 관심이 있는 친구, 단지 다이어트가 고민인 친구들까지 싹 다 데려오라고 하셨다. 날아오는 공을 잡지 못해도, 방망이에 맞히지 못해도 누구나 놀러 와 웃으며 운동하는 분위기와 시간이 조성됐다. 아버지는 회비도 걷지 않으셨고, 장비는 꼭 필요한 것만 학부모님들과 회의를 통해 구입하셨다. 큰 이모부가 타시던 오래된 갤로퍼를 받아오셨으며 뒷 좌석과 트렁크에 장비를 실어 보관하고 주말이 되면 그 차를 운전해 운동장으로 나가셨다. 아버지 인맥으로 초빙하신 코치님, 점점 실력도 늘리며 그럴듯한 선수가 되어있는 친구들과 팀을 보며 놀랐다. 그 어떤 지도자도 아닌 아버지를 통해 누구나 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어떻게든 실행하면 구색이 맞는 그림이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아버지가 알아보신 연맹에 우리 팀이 가입해 다달이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경기장에만 가면 벌벌 떨고 어리바리한 친구들에 오합지졸인 팀 분위기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상대로 만나는 팀들 중에는 이전에 겪었던 것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있고 감독이 아이들을 갈구는 분위기의 팀들도 몇 보였는데, 그런 팀들도 우리가 이기게 되었고 '아무리 선수들 험하게 굴리고 혼내봐라 즐기며 엉뚱한 야구를 구사하는 우리보다 못하면서'하는 이름 모를 쾌감도 있었다. 경기에 유리한 상황이던 불리한 상황이던 아버지는 팀원 모두에게 기회를 주셨다. 실력,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하지 못하고 비교적 어린 친구들도 다 같이 경험하고 출전한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아들임을 떠나서, 다시는 보지 못할 존경스러운 지도자이셨다.

그렇게 아버지 덕분에 내가 사랑하는 야구를 훨씬 다양한 모양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주말에 친구들과 놀듯이 운동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준이었고, 이미 중학교 시절을 보내며 다른 분야에 시선은 돌아가있었다. 피아노 연주, 컴퓨터 미디 작곡, 힙합 공연과 작사 작곡. 내 음악을 만들고 발표해 활동하는 아티스트를 꿈꾸게 되었다. 평생 야구만 할 것 같던 야구돌이의 장래희망이 바뀌는 과정은 시간에 힘을 빌려 무척이나 자연스러웠고 더 이상 야구에는 미련 한 점도 없었다. 고등학교는 집과 조금 떨어진 남양주시 소재의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양평보다 잘 발달되어 있는 음악학원이나 연습실, 작업실을 이용하기 편했다. 그렇게 체감 상 점점 빨라지는 시간을 붙잡고 지식과 커리어를 넓히기 위해 바삐 달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장비를 구입해 자작곡을 만들고 녹음해 음악공유사이트에 게시하거나 기획사에 제출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춤까지 배워 연예기획사 오디션을 보게 되는 일도 생겼고, 연습생으로 계약하게 되기도 했다.(이후에 연습생 생활이 힘들어 금세 그만두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바로 서울로 나가 숙식생활이 가능한 스튜디오에서 생활했다. 다른 영감, 다른 풍경을 찾아 작업실과 자취방 이사도 4번이나 하게 되었고 150여 곡 정도의 곡을 만들었다. 2년제 실용음악학과에도 어찌어찌 입학하게 되었고 내 예술성을 갈고닦아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고, 누구나 그렇듯 기뻐하기도 불안해하기도 하며 다양한 기분과 삶을 겪어내며 지내고 있다.

여전히 주말이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양평으로 간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회인야구팀에서 경기를 한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구경만 다니던 팀에서 어느새 성인이 되어 함께하고 있다.

삼촌뻘들에게 형님이라 부르고, 구수한 아재개그가 난무하는 곳에서 여유로운 주말을 만끽한다.

21살에는 운전면허도 취득하게 되었지만 운전할 차가 없어 마음대로 운전 연습을 하거나 자유롭게 어딘가로 다니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가끔 차를 빌려주시는 일을 호시탐탐 노리기도 했지만 걱정이 많으신 탓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야구를 하러 간다고 말씀드리면 차를 빌려주신다. 야구장에 가는 길은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다녔던 곳이고, 신호에 걸리거나 차가 막힌다던지 복잡한 교차로를 지나는 길도 거의 없다. 좋아하는 운전과 야구를 할 수 있는 주말엔 나는 기분이 참 좋다.

평소와 달리 이른 아침에 일어나 피곤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벼운 몸을 이끌어 차에 몸을 싣는다. 운전 조심해서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동네 편의점에 들러 얼음컵과 커피, 담배 한 갑과 초코바를 산다. 일하고 있는 동네 형에게 반가운 인사를 웃으며 건넨다. 기분과 날씨에 적합할 것 같은 노래를 재생시키고 북한강변을 따라 쭉 달린다. 액셀을 강하게 밟으며 속도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다. 야구, 운전, 음악 감상, 맑은 날씨. 그 순간만큼은 내가 온갖 좋아하는 것들로만 구성된 시간이다. 몸에 서서히 도파민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심장에 적당한 찌릿함이 가미된 행복감을 느낀다. 주말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어릴 적에는 야구가 없으면 내 삶이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기라도 한 건지 너무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내가 사랑하는 일의 부산물들은 제거하고 오로지 즐기는 마음만으로 사랑하고 있다. 선수가 되지 못했더라도, 어릴 적 과로로 인해 몸이 성장하면서 어깨와 팔꿈치가 많이 상했다고 하더라도 난 충분히 사랑하는 일을 곁에 두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직업이나 직장만이 꿈이 아니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온다. 자기 계발서나 인성교육 등등..

마찬가지로 내 꿈은 이런 주말을 오래오래 느끼고 더 바빠질 삶 속에서 나에게 여유를 주는 이런 일이다. 이번 주말도 내 마음이 잔잔해지고, 괜스레 웃음이 나는 일로 채워지면 좋겠다. 늘 그렇듯 바라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경험과 기분은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난 바란다. 이번 주말에 날씨가 좋기를, 야구 경기가 있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