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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하 Jul 31. 2024

'그녀에게 꼭 이야기하기'

나의 외로움 회복일지

유독 많은 일이 겹치던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정했던 오늘의 목표가 있었다. '그녀에게 꼭 야기하기'였다.


나는 나름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여자친구가 있었고 우리의 시간은 늘 그랬듯 설레고 새롭던 초반, 편안하고 든든한 중반넘어 매일같이 부딪히고 싸워 토라지며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애석한 위기까지 거쳐졌다.

많은 선을 넘었다.

사랑이라기보단 자존심 지키기, 방어기제 종합전, 피해망상 과시 경연대회라고 해도 그럴 만했다. 서로의 마음속 깊은 곳을 긁고, 할퀴었다. 언행은 원수지간처럼 험해지고 나는 휴대폰을 바닥에 집어던지거나 길가에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차는 등 기어이 폭력적인 모습까지 보이고 나서야 진정으로 끝에 도달했다.

그 이후로 미련이 허전함 때문에 다시 붙어보자는 이야기도 여러 차례 오갔으나, 마법처럼 대화의 끝은 결국 싸움이었다. 아무리 예쁘고 소중한 추억들을 나눴다고 해도 이미 뒤틀려버린 관계와 마음을 다잡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 일은 미화되고 더 예뻐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젠 소중했던 추억들, 경험들 마저 이불을 발로 차거나 소름을 돋을만한 트라우마로 간주되었다.

계속 의미 없는 미련 남기기에 혈안 되었던 우리를 진정으로 갈라 두고 함께보다는 나를 최우선시하겠다는 의미에서 세운 오늘의 목표였다. '그녀에게 꼭 이야기하기.'

전화기 너머로 단지 음성을 듣는 것뿐일 텐데도 우린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격양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무덤덤하게 마지막 전화 통화를 마치자는 의도였지만 쉽지 않았다.

대신 내 입장을 이랬다는 둥 그랬다는 둥 흥분하며 이야기하기보다 그녀의 막말들을 곧이곧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을 넘어 진정으로 마지막에 다다랐다.

난 학창 시절부터 꾸준히 이성친구를 만나왔다. 누군가에 금방 마음이 생기는 금사빠 기질에 더불어 쉽게 빠져들었다가 쉽게 식어버려 오랜 시간 만남을 가져본 적이 없다.

친구들은 나를 카사노바나 바람둥이라며 꾸중했고, 나 역시 내가 가진 인간관계가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으레 있다. 모든 관계에 필수적으로 찾아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치 상황이나 위기. 이겨내기보다 도망쳐 버릇 한 내 태도에 죗값이 붙어 진정으로 곁에 사람이 필요할 때에 극대화된 외로움을 받는 벌, 혹은 소중한 인연들에게 상처를 안긴 것에 뼈아픈 후회를 하는 벌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지 않은 눈으로 볼 것만 같은 피해망상이 생기고, 더 성숙한 인간관계를 위해

누군가와 만남을 갖는 일마저 더 이상은 어려워진 상태가 되었다.


오늘은 7월 23일. 내가 좋아하는 야구팀인 기아 타이거즈의 김도영 선수가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날이다.

(사이클링 히트-야구에서 한 경기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을 모두 쳐내는 보기 드문 기록)


동시에 이미 헤어진 여자친구와 우리가 가졌던 시간들이 남긴 부산물들을 억지로 붙잡고 옥신각신하다 진정으로 관계를 끝마치게 된 날이기도 하다. 여전히 세 살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문득 6년 전에 만났던 첫사랑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현 여자친구와 연을 끊고 오래전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홧김에 안부를 묻는 스토리는 아니다.

시간도 많이 지났고 그동안 술기운을 빌려 전화를 건다거나 sns 스토리에 답장을 남기는 식의 일절의

컨택조차 없었다.

단지 염치 불고하고 확인하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이 누가 봐도 정말 나쁜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 하나 마음 편하자고 아등바등 자존감 지키기에 혈안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지금이라도

묻고 싶었다. 생각보다 훨씬 어렸던 나이에 철없는 나 때문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냐고.

조금은 구질구질하기도 하고 머뭇대는 듯 보이는 말투로 큰 마음을 먹고 연락을 남겼다.


'너무 많이 놀랄 지도 혹은 당황할지도 몰라.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뭐 하고 지냈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얘기해 줄래?'


미쳤다. 최악이다.

손 발이 오그라드는 상황에 멘트도 구리다.

하지만 최대한 아무 의도 없이 순수하게 근황을 궁금해한다는 것을 전달하는 게 목적이었다.

혹시 그 친구의 좋은 시간으로 채워질 하루에 살짝 벗겨진 네일아트같이 걸리적거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20여분 뒤 온 답장을 보고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예상했듯 그녀에게 난 아예 모르는, 몰랐던, 평생 모르고 살 생소한 사람이 되어있는 것은 고사하고 인스타그램의 다단계나 즉석만남, 스팸메시지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당황스럽지만 기억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해서 잘 지내고 있다.'


나름대로의 성의를 보여준 듯하다. 형식적이지만 담백한 답장이었다.

동시에 내가 너무 오만했던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한 때는 존재했던 사람일 줄 알았는데 한 때는 한 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당연했다.

반대로 나는 인간관계를 가지고 제멋대로 구미에 맞춰 살아온 주제에 가끔 자기 전 천장을 팔레트 삼아 지난날들을 그려보기도 하고, 미안해하고, 그리워하거나 외로워하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던 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연락이 닿은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드라마틱하기보단 안도나 먹먹함이 조금씩 적절히 섞인 한숨이 나왔다.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유치한 사람이란 걸 요즘 들어 자주 깨닫는다.

난 그동안 뭘 그렇게 애틋해하고 미안해하고 아파했단 말인가.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도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나에게 혹독했던 시간들이 아려오기도 했다.

되짚어보면 사랑한다는 이름 모를 의미하에 누군가와 만나던 시간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무조건적인 의지와 신뢰를 가지고 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의 거의 전부를 바칠 만큼의 각오 정도 되어있어야 마땅했던 것 아닐까?

연인관계라는 단지 한 쌍을 뜻하는 단어 뒤에 아무런 의식 없이 무작정 숨어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개인 시간이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이다.

그 시간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북적북적 정신없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을 갖는 시간이다.

더욱 다양한 방면으로 소통하고 나의 가치, 내가 가진 언어를 구축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내 뜻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사를 적고 목소리를 녹음해 음원을 만든다.

타인에게 현혹되지 않고 마음이 흔들릴 정도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을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의 발전을 위해 내 개인적인 시간이 중요하다?

모순적이고 억지스럽다.

지만 나는 이제껏 그래왔다.


무언가를 깨달을 때가 된 것 같다.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기분은 늘 존재했고, 지금부터는 흔히 있었지만 충족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나 결핍 정도로 여기려고 한다.

무작정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꼭 쟁취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많은 돈이 필요한 일과 거액의 투자가 요구되는 일을 소망해도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노력과는 별개로 말이다. 또 귀찮고 피곤한 일을 제쳐두고 게으름을 피우려 해도 시간에게 뒤를 쫓기고 있는 기분도 종종 든다.


시간, 돈 등등...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는 것들이다.

소중히 아끼고 여기며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포근하고 안락함을 전해주고받는 타인, 온 마음을 다 해 걱정하고 격려해 줄 수 있는 마음, 기꺼이 나를 희생해서라도 의미 있는 일들을 경험하고자 하는 관계. 내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란 말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들마저 내게 너무나도 필요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없다고 해서 내가 고질병에 걸리거나 삶을 포기한다는 극단적인 결과는 낳아지지 않는다. 때문에 난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들 중 하나로 취급해볼까 한다.


다음 단계는 아마 대신할 것들을 찾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담배를 끊기 위해 금연 껌이나 니코틴패치를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대신한다기보다 그간 몰두해 온 사랑 뒤에 묵묵히 내 마음속에 꾸준히 소중한 존재로 남아준 고마운 것들이 있다. 친구들과 한껏 취해 나누는 대화들의 안락함, 상상만으로 흥분감을 전해주는 미래에 대한 버킷리스트, 나를 살게 해주는 내 노래의 가사와 아이디어들. 내겐 연애보다 더 소중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이것들은 그간 여자친구에게만 몰두한 나를 애석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다시

부둥켜안고 부딪히며 내 삶을 그려보려고 한다.

오늘 저녁엔 내가 아끼고 애정하는 아티스트 동료들, 친구들에게 안부전화나 한 통 돌려야겠다.

그리고 머지않은 휴가엔 아무런 부담이나 강박을 의식하지 못 한 채로 있는 그대로의 날씨와 하루를 느끼며 음악 작업에 집중하고,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글을 쓰고 싶다.

먼 훗 날 내가 진짜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사람보다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크고 단단한 사람이 된다면

목표를 다시 세워야겠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꼭 이야기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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