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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코집사 Jul 27. 2024

나의 직장생활 이야기(7)

스페셜리스트 vs 제너럴리스트(1)



“너는 직장생활의 목표가 뭐야?”
 

방송MD로 일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 때, 어느 선배와의 식사자리에서 그녀가 던진 질문이다. 그분은 훗날 임원이 되실, 당시에도 이미 부장으로 나와는 까마득한 차이가 났던 분이다. CEO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혀야 하나? 워라밸을 챙기겠다는 이기적인 대답을 해야 하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의도가 뭘까? 등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던 그분은,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 경쟁사에서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경력직이었다. 그 회사에서의 소회와, 본인이 잠시나마 근무하면서 느낀 이 회사의 컬러가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생각건대 전 회사인 C사는 직원에게 끊임없이 “스페셜리스트” 가 될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방송MD 직무는 그 안에도 의류패션, 잡화, 건강식품, 일반식품, 렌탈, 가전, 생활/인테리어 등 수많은 카테고리가 있다. 본인이 희망한다면 선택한 분야에서 계속 근무하여 이른바 사내 카테고리 킬러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누가 봐도 패션/명품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였다.


반면 지금의 이 회사는 반대라는 것이다. 직원에게 특별한 카테고리 전문성을 기대하기보다는, 두루두루 식견을 갖춘 제너럴리스트를 키워내는 것이 목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너는 둘 중 어떤 직장생활을 희망해?”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주변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강조한다. 바로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정된 소수정예의 인원으로 법인을 꾸려가야 하다 보니, 개개인이 담당하는 업무 범위가 매우 넓다. 또한 의사결정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창업 단계에서는 누구보다 빨리 시장을 선점해야 하므로 속도와 기민함이 매우 중요하다.


반면 대기업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수백, 수천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조직은 사람이 바뀌더라도 사업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즉, 인력보다는 시스템에 의존한다. 서면 결재 시에는 3・4중의 검토, 협조단계를 두어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한다. 이는 새로운 도전도 중요하지만 리스크 관리를 훨씬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 자리 잡은 브랜드도 한 번의 실수로 몰락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기업 구조에서는 담당업무 外 분야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문제발생 시 책임 소재를 야기하기에 불필요한 오지랖이 권장되지 않는다. MD의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브랜드를 견인하고 상품을 기획하는 것까지만 나의 일이다. 배송을 어떻게 할지는 SCM팀의 업무고, 라이선스 관련 분쟁이 일어나면 변리사나 법무팀으로 넘기면 된다.




위 선배와의 대화는, 이제 막 취업이라는 새로운 문에 들어서 안심하고 있었던 내게 모종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나의 모습은 취준생 때 내가 꿈꾸던 모습과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내가 상상하던 나의 커리어는 웹툰 미생과 같이 종합상사에서 무역 일을 하거나, 제조업의 관리직과 같은 이미지였다. 테헤란로나 을지로의 빌딩 숲에서 정장을 한 채 계약을 검토하거나, 통계 프로그램을 돌리거나, 기획안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화이트 칼라.



하지만 신입사원이 된 내 모습은 상상과 많이 달랐다. 우선 복장부터 자율 복장이었다. 둘째로 복잡한 행정업무가 거의 없었다. 어느 임원분인가가 일선 MD들에게 복잡한 서면보고서 등 불필요 행정업무를 근절하라고 지시하셨다는 모양이다. 수많은 paper 업무들은 오롯이 지원/관리부서의 몫이 되었고, 영업부서는 신규 브랜드를 발굴/견인하거나 정액비를 협상하는 순수한 영업활동에 집중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PC를 사용하는 업무라고는 끽해야 상품코드를 생성하고 웹 기술서를 기입하는, 고등학생도 쉽게 할 법할 수준의 일만 처리했다. 군대에서조차 수십 건씩 작성하던 보고서를 여기서는 거의 작성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동시에 있는 법이다. 불필요한 행정업무를 모조리 간소화한 덕분에 업무 효율이 상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배들은 또 다른 고충을 토로했다. 바로 커리어 범용성이 위축된다는 것.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프로답게 다뤄야 할 엑셀도 거의 쓸 일이 없고, 회계에 대한 기본지식도 필요치 않으며, 보고서를 작성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런 번거로운 일들은 모두 staff 부서에서 처리하도록 위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10년쯤 시간을 보내면 아무런 외적 skill 향상 없이 시간만 보낸 셈이 된다. 엑셀로 보고서 한 자 적지 못하는 직장인을 어디 쓰겠는가. 그러다 타 부서로 발령이라도 나면 바보 취급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일단 나는 영업부서에서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할 생각이 없다. 적성도 맞지 않고 재미도 없었다. MD에 커리어가 묶이게 되면, 이직을 하더라도 동업계의 MD 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굳이 선택한다면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다. 보다 다양한 직무를 경험하면서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공부하고 싶다. 그게 이 회사에서의 성장 혹은 나중에 나가서 내 일을 하더라도 훨씬 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대충 흐지부지하며 그날의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부서배치는 개인의 직장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어느 부서에 배치받느냐에 따라 적성에 부합하여 회사생활에 재미를 붙일 수도, 당시의 나처럼 회의감만 잔뜩 안고 패배주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년 말 직원을 대상으로 전환배치 희망 신청을 받는다. 어느 부서 or 어느 사업소로 전보되느냐가 승진발령 못지않게 직원을 들뜨게 하는 사안이다. 또 당연하겠지만, 누구나 '요직'으로 불리는 부서로 전보되기를 희망한다.


훗날 내가 인사팀으로 전보되었을 때, 혹자는 '요직'으로 발령 났다고, 부럽다고 이야기했다. '요직'의 기준이 뭘까? 그 사람에게 있어 요직의 기준은, 짐작하건대 직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이)고 많은 정보량을 쥐고 있는 자리일 것이다. 동의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사기업에서 '요직'과 '한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정의해 보자. '요직'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직장생활의 목표는 다르겠지만, 회사생활에 재미를 붙인 사람이면 누구나 경영자, 즉 임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임원 승진이 용이한 자리가 이른바 '요직'이 아닐까? 동아일보에서 2014년도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30대 그룹 기준으로 임원 승진이 용이한 직무는 다음과 같았다.

(더 최근 자료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전략기획 29.6% / 기술 27.2% / 영업마케팅 11.7% / 연구개발 10.7% / 지원 9.3% / 재무 3.3% / 인사 2.5% / 구매 1.6% / 서비스 1.4% / 홍보 0.6% / 기타 2.1%


전략기획 직무의 임원 승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결과론적인 해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통 전략기획 직무는 신입사원을 받지 않는다. 현업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에이스 소리를 듣는 직원들을 전환배치 시키는 경우가 보통이다. 또한 임원 승진 대상자 중 탁월한 사람을 팀장으로 발령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임원 승진율이 높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두 번째 직무인 ‘기술’의 경우, 엔지니어의 숫자와 기여도가 높은 제조업에서 기술직 임원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회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속한 회사의 경우 재무・회계 직무의 최고경영자 승진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회사가 해당 직무역량을 최고경영자로서 필요자질로 판단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약간 생각이 다르다. CFO면 모를까 CEO의 필요충분 자질이 과연 그것뿐일까. 애초에 경영자로서 필요한 직무가 정의될 수 있는 부분일까? 이러한 질문에 빠지는 순간 회사생활  회의로 가득 차게 된다. 직무는 내가 원한다고 바꿀 수 없는 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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