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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코집사 Oct 19. 2024

나의 직장생활 이야기(17)

부서 이동(2)

내가 속했던 명품잡화팀과 온갖 영업팀들이 사옥 10층에 위치했고, 인사팀을 포함한 모든 재무/관리부서는 9층이었다. 전보발령이 난 후 고작 한 층을 내려왔을 뿐이었다. 평소 업무 협조차 자주 들렀던 공간임에도 내 짐을 들고 구성원으로서 방문한 소감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영업부서의 사무실이 왁자지껄한 총천연색이라면 관리부서의 느낌은 묘하게 잿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원들의 복장부터가 달랐다. 영업부서의 경우 후드집업과 반바지를 제외하고는 복장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또한 모든 MD들의 자리 위엔 각종 샘플들이 그득그득 들어서 있었다. 반면 경영지원 부서는 셔츠나 피케티, 슬랙스 혹은 치노팬츠가 가이드라인인 듯 보였다. 책상 위에는 샘플 대신 문서철과 전표 박스가 가득했다. 


영업부서는 각종 미팅과 전략회의, 시장조사 등으로 사무실 자리에 앉아있는 비율이 채 절반이 안 된다. 이는 회사 차원에서도 권장하는 바였다. 반면 관리부서는 대부분이 자리를 지킨 채 문서를 만들거나, 숫자를 검토하거나, 유선전화로 누군가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층별 인원 수가 비슷함에도 묘하게 인구밀도가 높아 답답했다.


마치 전혀 다른 회사로 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이 퍽 마음에 들었다. 영업부서에서의 지난 3년간의 케케묵은 고민거리들이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된 것이다. 심지어 사무실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다 보니 마치 이직한 것 같은 해방감이 들었다. 비교적 딱딱한 분위기, 엄숙하고 절제된 듯한 공기의 무거움은 내겐 친숙했다. 




영업기획 부서를 지원한 내가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영업기획 파트장과 티타임을 신청한 후, 감사하게도 해당 부서장님이 날 데려오는 것으로 인사팀에 요청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인사팀에서도 나 정도 되는 (사원 말년차~대리 초년차) 직원에 대한 니즈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FA시장에 내가 나온 것을 보고, 평판 조회 후 쓸만하다고 판단하여 중간에 낚아챈(?)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업기획 팀장님이 인사팀에 뒤늦게 항의하셨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운이 좋게도 진짜 희망부서였던, 하지만 가능성이 낮다 판단해 차마 신청하지 못했던 인사팀으로 발령 나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 발령은 내 직장생활의 이후 향방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파트장과 함께 전 회사를 돌아다니며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인사팀으로 온 이상 회사의 모든 부서 직원들과 안면을 틀 필요가 있었다. 이런 형태의 부서이동이 흔치 않았기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일반적인 직원들은 인사팀이면 직원 인사를 좌지우지할 힘이 있다고 오해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축하한다는 반응이었다. 


팀에는 꽤 많은 수의 직원이 있었다. 인사팀장님 아래 HRD와 HRM은 파트 단위로 구분되어 있었고, 내가 속한 HRM 파트는 책임(과/차장)급 파트장 한 명, 선임(대리/사원)급 직원 4명에 급여/근태/복리후생/사대보험 등을 담당하는 업무지원직 직원들이 꽤 여럿 있었다. 선임급 중에서는 내가 딱 중간 정도의 위치였다. 




내가 처음 발령받고 담당한 업무는 보상(페이롤), 그리고 경력직 채용이었다. 이 팀은 나 빼고 모두가 이미 프로들이었다.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에도 익숙하고, 조직 구조와 직원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빠삭했다. 타 팀에서 발령받은 주니어 직원으로서 익혀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선은 근로기준법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수였기에 각종 서적을 읽고 외부강의를 수강할 것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 지식들은 공부하고 익히면 그만이었다. 내가 가장 조바심이 났던 분야는 다름 아닌 보고서 작성 스킬이었다. 참고로 나는 영업부서에서는 수치를 다루고 문서를 정리하는, 이른바 paper work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고 잘한다는 얘기도 곧잘 들어왔다. 그러나 경영지원 부서의 보고서 기대 수준은 이와는 많이 달랐다. 


영업부서의 보고서는 어쨌든 매출과 공헌이익이 핵심이었기에, 전년비/전월비/전분기 대비 현재의 실적을 표로 정리하고 이에 대한 시사점을 찾거나 호조/저조 카테고리의 이후 계획을 작성하면 그만이었다. 반면 인사팀의 보고서는 이보다 좀 더 복잡다단했다. 


우선 다뤄야 할 수치의 종류가 많았다. 인력에 대한 현황 外에도 인건비를 다뤄야 했다. 또한 새로운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 타당성과 근거 확보가 쉽지 않았다. 영업부서야 매출만 확보된다면 무엇이든 도전이 가능했지만, 인사팀에서 추진하는 일들의 기대효과는 대부분 무형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내용뿐 아니라 양식과 폰트, 여백 활용까지도 가독성이 훨씬 우수했다. 이러한 노력들에는 전부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개인과 달리 법인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집단 지성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집단 지성을 발휘하는 과정은, 실무자 - 중간관리자 - 임원에 이르는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하며, 이 과정은 모두 문서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부서 간 소통이 쉽고, 히스토리 관리가 용이하며, 추후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책임 소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만약 문서가 내용이 부실하거나 가독성이 나쁘다면 효율적으로 사안을 이해하고 소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직장인들은 조금이라도 읽히는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본인 주장을 쉽게 관철시키기 위해서, 의사결정권자를 거슬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문장을 골라내고 숫자를 검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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