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 이동
‘사자가 이끄는 양 무리가 양이 이끄는 사자 무리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형편없는 리더를 만나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저 격언의 통찰이 얼마나 깊은지 새삼 느끼곤 한다. 사자와 같이 훌륭한 팀장님을 만난 덕분일까, 나도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형편없던 역량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패션MD로서 지녀야 할 감각이나 트렌드에 대한 이해도 등은 노력한다고 쉬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평생 무던한 머스마로 살아온 나는, 다른 관점에서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두 가지에 집중했다. 첫 번째는 미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실생활 수요가 높은 아이템을 찾아 大 물량 先 기획하는 것. 두 번째는 보고 문서 작성 따위와 같은, 사업부 차원의 허드렛일을 자진해서 하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팀 內 다른 구성원들은 미적 센스가 훌륭한 만큼 이러한 허드렛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일들을 모두 끌어안아준 내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시하고는 했다. 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하면서도,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될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이 전략은 어느 정도 먹혀들어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Paper work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기에 과제들을 무난히 수행했고, 우리 사업부장님(임원)은 내게 사업부 차원의 보고문서 작성 역할을 맡기셨다. 보통 과장 승진을 앞둔 대리급이 하는 일을 비교적 이른 년차에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내게 작은 성취감을 가져다주었고, 난 1년 정도 묵묵히 이런 일들을 수행해 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고민이 깊어져 갔다. 이러한 staff 역할 수행만으로는 결코 영업부서에서 좋은 인재가 될 수 없었다. 내 강점이 무엇인지 확인했으니, 이를 잘 발휘할 필드를 찾아야 한다. 난 진지하게 부서 이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고민한 부서는 HR 부서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난 군대시절 인사장교로 재직했고, 법규 준수 여부를 점검한다든지, 상황에 맞게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등의 일이 재미있었다. 조직의 여러 프로세스를 점검하고 이를 효율화하는 것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더군다나 사기업의 인사업무는 누구나 동경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인사팀으로 이동을 신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사팀 그 누구와 일면식도 없는 상황에서 덜컥 부서이동 신청을 한들 받아들여질 리도 없고, 이후의 내 행보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HR 외에 잘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난 상술했듯 프로세스 개선에 관심이 많았고, 엑셀 파워쿼리 등의 tool 활용에 관심이 많았다. 특정인의 ‘감’에 의존하기보다는, 축적된 데이터와 체계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조직을 개선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전사 실적을 관리하는 영업기획 부서로 이동 신청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특정 부서로 전환배치를 희망하면 우선 그 부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들 했다. 다행히 난 당시 영업기획 부서의 파트장님과 최소한의 친분은 있었다. 그분이 나를 괜찮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 아침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질 즈음, 난 그분께 메신저를 보내 커피 한 잔 사주십사 약속을 잡았다.
※ 참고(부서이동 전략에 대한 브런치글) : https://brunch.co.kr/@lovewant/232
난 성격상 1:1로 누군가와 만나 친분을 쌓는 행위가 서툴다. 이번 건 또한 내가 먼저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으나, 나보다 한참 선배였던 그분을 만나 내 속사정을 늘어놓는 것이 조금 두렵고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책임님 부서에 결원이 난다면 내가 가서 일해보고 싶다고. 최선을 다할 자신이 있는데 책임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고.
그 뒤의 대답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분 또한 팀장이 아니라 파트장이었기에, 확정적인 어휘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팀장님께 보고해 보겠노라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이 돌아왔다. 내가 원하는 건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 팀에서 누군가를 영입해야 한다면, 후보군 중 나를 포함하여 고민하기를. 그 팀의 팀장님과 파트장이 나를 괜찮은 카드로 생각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 처분만 기다리면 된다. 마음이 헬륨풍선처럼 붕 떠있었다. 이동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지금 부서의 어떤 일에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부서 이동에 대한 기대감을 담아, 티 나지 않게 조금씩 동료들에게 내 업무를 인수인계하기 시작했다.
11월은 승진, 이동발령이 있기에 회사의 구성원 대부분이 한없이 가벼워진다. 조직 전체가 승진 대상자의 눈치를 살피고, 부서를 이동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까닭 없이 분주하다. 11월 중순에 인사발령이 있을 거라는 지라시가 돌았고 당일 오전 7시에 나는 HR 파트장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나와 함께 일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