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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연 Jun 25. 2024

프롤로그  

아빠의 죽음 이후, 나는 때때로 곤란해진다


여느 때와 같이 SNS로 시간을 보내던 날이었다.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영상 하나에 손가락을 멈추고 눈을 고정했다.

외국 요리 프로그램의 한 장면 인듯하였다. 금발의 젊은 여성이 분초를 다투는 경연 현장에 서있었다. 유리병에 든 요리재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뚜껑은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엔 다급함과 당황스러움이 완연했고 그녀를 응원하는 가족들은 애를 태우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순간 그녀가 재빠르게 유리병을 들고 한 남성에게로 뛰어갔다. 그 남자는 그녀가 내민 유리병을 받아 들고 순식간에 뚜껑을 열어 건네어주었다. 0.1초 만에 이 같은 괴력을 발휘한 남자는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사람들은 다급히 뛰어가는 딸에게 시선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시선이 고정됐다. 그리곤 주르륵.


“ 아... 또 시작이네.” 이미 말릴 세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빠가 죽고 5개월이 지난 지금 까지도 나의 이 눈치 없고 주책없는 눈물 타이밍이 문제다. 일상생활 중 특정 어느 시점에 슬퍼지는 게 아니라 뜬금없이 왕왕 일어난다.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은 날, 차를 끌고 도로를 달리다 음악이 너무 신나 몸을 흔들다 운다. 어느 날은 뻥튀기에 아이스크림을 올려 먹다 너무 맛있어 운다. 달리기를 하다 아빠 나이 또래의 아저씨들이 낮술을 마시고 얼큰해진 얼굴로 웃고 떠들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울기도 한다.  

운전길에 습관처럼 아빠에게 전화를 하던 우리의 통화가 그립고, 손주가 좋아하는 뻥튀기를 준비하던 아빠가그립고, 왜 저 아저씨들은 친구들과 낮술 한잔 하며 즐거운데 내 아빠는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야만 했나 기막힘과 질투가 뒤섞인 그리움에 나는 운다.


요즘에 들어서야 아빠에 대한 ‘그리움’ 이 선명 해져 가고 있다. 한동안 아빠가 해외여행을 떠나 있구나 생각될 정도의 거리감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이별을 했을 때 느끼는 그리움에 대한 감정이 내가 알고 있는 뜻과 무척이나 다르다는 걸 깨닫는데 5개월이 걸린 것이다. 그리움 이란 단어로 표현이 불가한 그 이상의 감정들이 때때로 밀려오면, 나는 저렇게 뜬금없이 울어야만 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울어서라도 말로 표현이 안 되는 먹먹하고 아득한 그리움의 실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 아... 우리 아빠는 죽고 없구나. 다시는 목소리를 들을 수도 손을 만질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구나. 앞으로 더 큰 그리움이 몰려오면 나는 속 절 없이 이렇게 울어야만 하는구나’ 그렇게 일상 곳곳에서 불시에 터져 나오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의 몸에서 태어나 40년이 넘는 시간을 공기처럼 당연하게 내곁에 있던 아빠였다. 너무도 당연하기에 사라져 없어질 거라 생각 못 하며 살아왔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의 곁엔 부모가 존재하기에 죽음이란 단어를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나 역시도 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인생은 죽음과 마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투병, 죽음, 장례, 애도와 같은 과정을 직접 경험하며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반문해 보는 시간을 갖고 있기도 하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누구나 내 부모의 죽음을 그리고 나 스스로의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내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는 일련의 과정을 글로 나누고 싶어 졌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누군에게 조금의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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