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액티브시니어'에 대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50대 후반이상의 시니어들의 이야기였다. 노년의 삶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시골 주택, 텃밭, 산책을 하는 평화로운 모습이 아닌 무척이나 다이내믹한 일상의 모습들이 그려졌다. 할리데이비슨 바이크를 타고 관련 용품을 모으는 사람, 문화공간에 모여 그림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 시니어 모델활동을 하며 릴스로 챌린지 영상을 올리는 사람.
그들이 하는 활동들만 놓고 보면 젊음과 노년의 경계는 사라지고 취향과 취미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가수 장민호의 팬클럽 어머니들의 해맑은 미소와 활력 넘치는 활동을 보며 이제는 우리가 생각하던 시니어의 모습은 앞으로도 많이 바뀌어 갈거라 생각됐다.
최근 들어 시니어들의 삶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단연 엄마 때문일 것이다. 54년 말띠생인 엄마는 어느덧 칠십을 넘긴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홀로 살아가는 엄마가 외롭거나 우울하지 않을까 종종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할 때마다 나의 예상을 벗어난 엄마의 행동 패턴들이 무척이나 재미있다.
"엄마 어디야?"
"나 지금 죽 먹으러 왔어"
"왜? 어디 아파??"
"아니~여기 죽 먹으면 임영웅 포토 카드 준다고 해서 먹으러 왔지"
그렇다, 엄마는 영웅시대 활동까지는 못 하지만 shy영웅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활짝 웃는 임영웅의 포토카드를 카드형 핸드폰 케이스 앞면에 꼽고 지칠 때마다 꺼내보는 순수한 덕질러.
엄마의 이런 순수한 덕질은 비단 임영웅에서 그치지 않았다.
"엄마 뭐 하고 있어?"
"어머 얘~내가 지금 10시간째 중국 무협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멈춰지지가 않는다. 나는 이런 무협 영화가 너무 좋은 거 있지"
"눈 나빠져 적당히 쉬어가며 보셔요"
여고생 시절부터 무협 소설을 도장 깨기 하며 살아왔다는 엄마는 최근에도 중국 무협드라마 채널을 틀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보는 활동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꽤나 그럴싸한 스토리텔러이다. 자신이 읽거나 본 소설과 드라마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맛깔나게 전달하는 재능이 있다. 엄마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레 의사표현을 잘하는 아이들로 자라주었다.
팬텀싱어, 싱어게인, 히든싱어 같은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사랑하는 엄마는 그들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얘기한다. 오감의 행복을 두루두루 잘 활용할 줄 아는 엄마는 그야말로 바람직한 덕후의 표본이다. 한번 빠지면 꽤나 오랜 시간 진득하게 덕질을 하는 엄마를 보며 돈은 없지만 마음의 풍요와 감사를 아는 삶을 만들어 주는 것은 물질이 아닌 자기만족, 자기 행복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일까? 마흔이 되어 시작한 나의 덕질들이 엄마를 통해 자연스레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퇴직을 하고 공허와 허무를 등에 업고 살던 나를 살린 것 역시 bts와 웹툰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매사 진지하고 어른답게 살아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나의 소중한 보물들. 지친 일상의 끝에 잠시간 순수하게 즐거울 수 있는 활력요소. 그로 인해 인생이 조금 더 유연해지고 즐거워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내가 됐다는 것도 나름의 큰 변화이지 않을까?
다큐에서 본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장민호를 사랑한다 외치던 당당한 시니어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자신의 삶에 즐거움을 알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시니어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20년 뒤에 액티브시니어가 되어있을 나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청사진도 그려본다. 이 역시 엄마가 나에게 대물림 해준 소중한 지적 자산일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인간은 삶에서 달콤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 그 달콤함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에게 달콤함의 레시피를 남길 수 있다는 것'-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