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을 위한 만찬
아이들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자 남편은 바빠졌다.
고등학생을 주로 가르치다 보니 주말은 항상 당신의 아이들보다 가르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다.
12월 마지막 한 주를 제외하고는 수능을 준비하는 아이들을 위해 늘 바빴다.
온 세상이 늦잠을 응원하는 일요일 아침!
남들보다 서둘러 일찍 일어나 김밥 한 줄과 그가 애정하는 왕뚜껑 사발면을 사가지고 출근했다.
그게 그의 낙이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앉아 뜨거운 물 부어두고 먹는 라면의 맛은 일품이라고 했다.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고 했다.
이따금 내가 아침이라도 차려준다고 하면 자기의 소소한 기쁨을 빼앗지 말라며 한사코 거부했다.
나를 편하게 해 주려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진짜 남편의 소소한 기쁨이었을까
이제는 알 수 없지만, 늘 일요일 아침은 김밥 한 줄과 사발면 한 그릇이었다.
나의 마음은 조금 불편했지만, 그가 정말 좋아했기에 나의 무거운 마음을 좀 내려놓기로 했다.
사실 남편은 나보다 음식을 잘한다.
신혼 초에는 주로 내가 음식을 하고 설거지는 그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요리를 잘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라면만이 그의 요리의 전부였다.
결혼 5년 만에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고 일이 바빠지면서 남편이 요리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가 오직 잘하는 건 라면뿐이었는데 그때부터 그는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그저 친정엄마가 알려주는 방법대로 음식을 만들기만 했다.
같은 반찬만 매번 만들다 보니 발전도 없었고 새로운 요리 만들기에 도전 정신도 부족했다.
하지만 남편은 나랑 달랐다.
요리책을 사서 먹고 싶은 요리, 해 주고 싶은 요리를 공부해 가며 정량의 양념과 재료를 넣고 마법사처럼
뚝딱뚝딱 만들어줬다.
맛도 끝내줬다.
그가 만들어준 삼치 무조림은 우주 최강의 맛이었다.
아빠가 해주는 삼시 세끼를 먹어가며 뱃속의 아이들도 나도 무럭무럭 자랐다.
덕분에 출산까지 아이들을 잘 지키며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통 쌍둥이들은 태어나면 둘 중의 하나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우리 집 둥이들은 2.5kg, 2,45kg로 태어났고 인큐베이터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게 다 남편 덕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멈추게 되었을 때 남편이 아팠다.
수술과 3년간의 항암이 그를 힘들게 했지만, 그는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10년 전에도 뱃속에 아이들과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던 그가
이번에도 나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요리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할 수 있음에, 내가 살아있음에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항상 있다고
정작 이것을 모르고 살았다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 감사하다고 했다.
이 행복을 두고 사라질 그를 그는 너무 마음 아파했다.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며 그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비록 그는 그가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없었지만,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대신하곤 했다.
어느 주말 저녁!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두 아들이 대화를 나눈다.
아빠가 만들어준 자장면, 짬뽕, 잡채밥, 치킨, 깐풍새우, 마파두부 또 먹어보고 싶어
사서 먹는 요리와 비교도 안 될 정도였어.
13년 평생 동안 그렇게 맛있는 요리는 없었어. 그렇지?
맞아 내 소울 푸드야.
우리 아빠는 참 요리를 잘했어. 아빠가 한 요리는 진짜 다 맛있었어.
또 먹는 이야기냐며 핀잔을 주고 돌아서며 나는 웃었다.
그래 아빠가 너희에게 이런 추억을 남겨주고 갔구나.
아빠를 그리워할 수 있는 음식이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너희들의 소울 푸드!
아빠가 만들어준 음식!
흔하디 흔한 음식이지만 그 음식을 통해 아빠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아빠가 만들어준 음식으로 함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게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는 소중한 추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남편이 만든 몇 장의 사진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