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때?”
한의대를 포기하면서 선택한 과는 건축학과였다. 뭔가 공학과 예술을 어우르는 듯한 학문에 건축가라는 직업이 그럴싸해 보였다. 하지만 고3 때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던 그런 열정은 없었다.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날들이 많았고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했고 학업은 다시 뒷전이 되었다. 삶의 목표를 다시 찾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가장 큰 전환점은 태국에 쓰나미 봉사활동을 갔었을 때였다. 의사가 되는 꿈은 저버렸지만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고 우연한 계기로 해외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는 쓰나미로 폐허가 되어버린 곳을 돌아다니며 잔해를 치우는 건 돕고 학교나 고아원을 돌며 쓰나미로 가족을 잃은 어린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날은 어느 때처럼 해변에서 가까운 학교에 있었는 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패닉상태가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제2차 쓰나미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지붕을 올려다보며 피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처음으로 내가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던 이 삶이 일찍 마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이 울린 게 잘못된 경보였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때 느낀 급박감의 여운이 오래갔다. 태국에서 남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다. 그리곤 모토로 정한 게 ”Live life to the fullest”였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자.
그렇게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의 삶은 다시 생기가 넘쳤다. 내가 가진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건축이라는 전공도 재밌었다. 건축을 하려면 프랑스의 거장, 르 꼬르브지에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도면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면서 밤을 새우는 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당시에 건축을 하면서 그렸던 도면과 그걸 모형으로 만들면서 3D로 재현해 냈던 과정이 지금 정형외과를 하면서 엑스레이를 보면서 실제로 골절의 형태를 파악하는 데 수술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도면을 그릴 때 외벽을 그릴 땐 같은 선을 계속 힘을 주면서 그려서 종이 뒷부분이 볼록하게 나오게 그려서 내부의 벽과는 다르게 표현한다. 지금은 환자의 수술부위를 절개할 때 수술칼로 선을 긋는다. 피부 아래에 있는 조직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지만 피부는 한 번에 가를 수 있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세계를 무대로 삼는 건축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을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때 당시에는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Pre-dental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와 얘기를 하다가 내가 잠깐이나마 꿈꾸었던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되는 얘기를 했고 그녀는 말했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되는 과정이 대학원 과정이라고.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때?라고. 그녀가 그렇게 지나가듯이 한 말은 내 안에 작은 불씨가 지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