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그 시작, 김영삼 떠나다
1954년 거제에서 만 26세의 나이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박정희 정부로부터 질산 테러 등의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1993년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었고, 문민 정부를 열었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허용하였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1993년)를 도입하고 차명 부정 계좌를 단속 및 처벌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였고, 국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또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여 처벌하였고,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서거하였다. 서울대학교병원 측은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후 기자회견에서 급성 패혈증과 심부전증이 사인이라고 밝혔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 기간의 국가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장지는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