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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Oct 01. 2024

에도가와 란포 「심리시험」, 추리와 심리의 만남

범인, 동기, 수법은 중요치 않다


에도가와 란포의 「심리시험」을 읽었다.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 모음집인 『도플갱어의 섬(이상미디어)』에 수록되었다.     


「심리시험」을 읽은 이유는, 좋아하는 게임인 <역전재판> 시리즈의 원형이 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전재판>은 2001년에 처음 발매된 일본의 미스터리 법정 게임으로, 증인을 추궁하여 모순을 찾아내고 사건을 해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사건도 추리를 통해 풀어나가는 방식이 매력적이며, 곳곳에 생각지 못한 트릭이 탄탄하게 설정되어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사건의 구성뿐만 아니라 이를 풀어나가는 독특한 방식에 감탄하곤 했다. 게임의 제작 총괄자 타쿠미 슈(巧舟)는 어릴 때 읽은 「심리시험」에 영향을 받아 추리소설의 세계에 빠져들었으며, 이후 「심리시험」을 발상의 원점으로 삼아 <역전재판> 시리즈를 개발했다고 한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구성하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여했다.     


중학생 시절에 유명한 추리소설을 몇 편 읽어보았지만, 추리소설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사람이 죽는 이야기를 보는 것이 싫었다. 한 사람이 어떤 의도, 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가 결코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추리소설에서는 보통 ‘누군가의 죽음’이 이야기의 발단이자 대전제가 되는데, 죽음 그 자체보다 범인, 동기, 트릭에 더 주안점을 두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 피해자는 그저 피해자이기 위해 죽었을 뿐이다. 그래서 추리소설을 연달아 읽다 보면 그 속에 깔린 은근한 생명 경시의 풍조가 느껴진다. 한 사람의 죽음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그 죽음의 무게를 진지하게 다루는 경우라면 그나마 나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잔혹한 죽음을 다루는 소설을 읽는 것이 정신에 이로운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에 프라이밍 효과(Priming effect)라는 개념이 있다. 프라이밍 효과란, 하나의 자극에 노출되면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자극이 이후에 접하는 자극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 암시가 뇌에 미치는 힘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뉴스를 자주 보면 기분이 우울해지기 쉽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찬가지로, ‘살인’이라는 자극이 지속적으로 뇌에 입력되면 무의식 중에 사고가 파괴적인 방향으로 흐를 우려가 있다.     


그래서 일부러 추리소설을 찾아 읽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역전재판>의 원형이 어떤지를 알고 싶다는 확실한 목적과, <역전재판>의 뛰어난 완성도가 입증하는 「심리시험」의 치밀하고 훌륭한 구성에 대한 기대가 있어 읽기로 결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저자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 1894-1965)는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으로 불린다. 에도가와 란포는 필명이며,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郎)이다.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이 추리소설의 대가인 애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변형한 것임을 알고 나니, 기발하고 재미있게 필명을 지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이하는 「심리시험」을 읽고 생각한 점이다. 작품의 스토리 및 구성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원하는 독자들은 직접 책을 읽고 나서 아래 내용을 보기를 권한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역전재판 1>의 일부와도 연결된다.                   




「심리시험」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후키야 세이이치로(蕗屋清一郎)가 무슨 이유로 앞으로 써나갈 무서운 악행을 결심했는지, 그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또 설령 안다고 해도 이 이야기와는 별 관계가 없다.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의 재미는 범인을 밝혀내는 데 있지 않다. 범행 동기를 밝히는 것도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범인의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의 심산이 악독하다는 점을 추궁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후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범행에 사용된 후키야의 트릭을 모두 알 수 있다. 후키야가 어떤 방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는지는 물론, 그것을 경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어떤 수법을 썼는지까지 속속들이 드러난다. 이를 읽는 독자는 범인의 극도로 치밀한 범행 계획에 감탄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도대체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것은 작중 나오는 ‘심리시험’에 의한,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추리다. 이 작품에서 후키야는 자신의 친구와 함께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두 용의자는 ‘연상진단’이라는 심리시험을 받는다. ‘책’, ‘친구’, ‘요리’ 등의 단어를 읽어 들려 주면 피험자는 그것을 듣고 생각난 단어를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단어들 속에 사건과 관련된 단어를 몇 개 섞어 넣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포착하는 것이 연상진단의 방식이다.      


후키야는 심리시험에 앞서, 사건과 관계된 단어들에 대한 대답, 즉 의심을 피할 만한 대답을 가능한 빨리 말할 수 있도록 연습한다. 예를 들면, 후키야가 피해자의 돈을 훔친 장소인 ‘화분’이 제시되면,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연상하기 쉬운 단어인 ‘돈’ 대신 일상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단어인 ‘소나무’를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훈련한 것이다. 그는 심리시험에서 사건과 관련 있는 어휘인 ‘돈’에 대해 ‘지폐’, ‘피’에 대해 ‘흐른다’, ‘훔치다’에 대해 ‘돈’이라는 대답을 짧은 시간에 할 수 있었다. ‘훔치다’라는 어휘에 대해 곧이곧대로 ‘돈’이라고 대답한 것은, 사건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후키야가 일부러 생뚱맞은 단어를 말할 경우 일부러 범행을 숨기려는 인상을 줄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덕분에 의심의 화살은 후키야가 아닌 다른 용의자를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 감정을 의뢰받은 탐정 아케치 고고로(明知小五郎)은 다른 판단을 내렸다. 그는 후키야가 의심을 피해갈 만할 단어를 보통 경우보다도 빠르게 말했다는 점에 착목했다. 그는 후키야를 따로 불러내어 후키야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고 말해 안심시킨 뒤, 한 가지 사소해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내용은 이와 같았다. 그는 우선 후키야에게, 범행 이후 발견된 바 현장에 있던 병풍이 손상되었는데 이 병풍이 피해자의 물건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빌려 준 물건이어서 손상 책임에 대해 소유주와 피해자 유족 측의 분쟁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 병풍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지 후키야에게 물었다.    

 

아케치 탐정의 질문에 후키야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가 그 현장에 간 것은 딱 한 번뿐입니다. 그것도 사건 이틀 전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 병풍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확실히 흠집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이상한 점이 없는 증언이지만 이 발언은 그의 범행을 입증하는 커다란 한 수였다. 범행 현장에 병풍이 들어온 시기는 사건 발생 하루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키야가 현장에서 병풍을 보았다는 증언은, 사건 이틀 전에만 딱 한 번 현장에 방문했다는 증언과 모순된다. 아케치는 이 방식으로 후키야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었다.      


이처럼 범인의 모순된 증언만으로 완전범죄가 해결되는 스토리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가구가 현장에 들어온 시기가 결정적 근거가 되어 범인이 사건 당일에 현장에 있었는지가 판명되는 내용이 <역전재판 1>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반영되었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서술상의 독특함도 눈에 띄었다. 후키야의 치밀한 범행 계획 덕분에 그가 용의자로 지목되기 전으로부터 ‘심리시험’으로 서술의 흐름이 넘어가는 중간에 이러한 서술이 있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 탐정소설의 성격에 깊이 통달하신 여러분은 이야기가 결코 이걸로 끝이 아닐 거란 사실을 충분히 알고 계실 것이다. 바로 말 그대로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 이야기의 전제에 불과하고, 작자가 부디 여러분께서 읽어주길 바라는 것은 이제부터의 일이다. 즉, 이처럼 꾸민 후키야의 범죄가 어떻게 발각됐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이다.      

작품 시작에서는 후키야가 범인임이 밝혀지고, 중반으로 접어들기 직전에는 그의 범죄가 발각되었음이 미리 암시된다. 그가 범인임이 밝혀지는지 여부도 이 작품에서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아니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심리실험’을 바탕으로 한 아케치의 추리이며, 이는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서술 방식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범인의 범행 수법은 물론 범인이 결국 발각된다는 사실까지 작품의 초중반에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긴장감과 흥미가 팽팽히 유지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초반에 명명백백히 설명된 후키야의 트릭 자체가 흥미롭다.

범행을 들키지 않게끔 설계된 그의 면밀한 트릭을 단순하게 읽어내리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2. 심리시험이라는 소재가 참신하고, 독자 스스로가 심리시험의 결과를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작중에는 후키야와 다른 용의자의 심리시험 결과가 표로 제시된다. 독자는 그 결과표를 직접 분석하며 두 용의자의 답변 차이를 파악하고, 각 답변이 왜 그런 반응 시간을 보였는지 예측할 수 있다. 아케치 탐정의 해석에 앞서 독자가 직접 결과를 분석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3. 증언만으로 모순을 밝혀내는 방식이 흥미롭다.

후키야의 빈틈없어 보이는 범행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데에서 오는 통쾌함이 있었다.      


「심리시험」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교묘한 심리 기법을 바탕으로 한 추리소설이다. 용의자를 밝혀내기 위한 연상진단뿐만 아니라, 후키야의 범행 계획과 발각되지 않기 위한 그의 장치도 모두 철저히 타인의 심리에 대한 예측을 기반으로 한다. ‘심리’라는 요소가 적극적으로 접목되어 논리적이고도 세밀한 서술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도서 말미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심리시험」은 일본 ‘도서(倒叙) 미스터리’의 원조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여기서 ‘도서’는 도치 서술을 의미한다. 도서 미스터리는 범인의 시점에서 사건을 전개하며, 경찰이나 탐정이 그 치밀한 범행을 간파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본격 미스터리가 단서를 모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귀납적 추론을 따른다면, 도서 미스터리는 사건의 전모를 먼저 드러내고 빈틈을 찾아내는 연역적 추론을 따른다는 차이가 있다.


참고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는 에도가와 란포의 다른 작품들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케치는 한 작품에서 “가장 좋은 추리는 심리적으로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의 이러한 철학이 인간 심리를 전면에 내세운 「심리시험」에 적극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심리시험」은 세밀한 심리 파악을 통한 사건 해결이라는, 미처 몰랐던 추리소설의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또한 사건과 그 해결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내는 작가의 역량에도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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