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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Oct 01. 2024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프랑스 초연 감상기 (2)

‘보헤미안’을 통해 만난 새로운 세계


그날 밤, 나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녹화 영상을 찾아봤다. 소설을 모두 읽고 뮤지컬을 감상하는 것보다, 뮤지컬을 먼저 보는 것이 극을 빠르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하면 한국판 무대를 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한국판 영상은 구할 수 없었다. 대신 1998년 프랑스 공연의 전체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1998년이라는 시기와 프랑스라는 낯선 공간이 주는 거리감 때문에 처음에 조금 주저했지만 이것이 <노트르담 드 파리>의 초연 영상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어 자막이 없어서 영어 자막을 켜고 감상했고, 프랑스 공연 예술을 찾아본 것은 처음이라 신선한 경험이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인상에 남는 점은 다음과 같다.     




1. 압도적인 곡예와 무용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파리 초연 무대에서 단연 눈을 사로잡은 것은 곡예와 무용이었다.

      

광대들의 축제(La fête des fous)

그랭구아르(Gringoire)와 군중들이 가장 우스꽝스럽고 추악한 사람을 ‘광대 교황’으로 뽑는 퍼포먼스를 하며 부르는 곡이다. 상류사회를 조롱하는 군중들의 광기가 느껴지는 곡이기도 하다. 긴박한 곡조에 맞춰 바퀴 달린 철창을 이리저리 옮기며 사람들을 철창 아래로 내모는 듯한 퍼포먼스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군중들은 빠르게 다가오는 위협적인 철창 아래로 몸을 숙여 피하거나, 철창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며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선보인다. 두 손으로 물구나무를 선 채 공중에서 다리를 서로 교차하며 마치 두 팔이 다리가 된 듯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고, 고조되는 그랭구아르의 노래에 맞춰 공중제비를 돌기도 한다. 그들의 묘기에 가까운 춤은 극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기적의 궁전(La cour des miracles)

스페인식 기타 연주로 시작되는 이 곡은 방랑자들과 그들의 우두머리 클로팽(Clopin)이 방랑자 소굴에서 부르는 노래다. 클로팽은 무대 공중에 떠 있는 철 지지대 위에 걸터앉아 종교도 국적도 없는 방랑자들의 처지를 호소하며 무언가를 향해 추궁하듯 노래한다. 무대 위 방랑자들은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서서 균형을 잡기도 하고 쌓여 있는 박스들 위를 회전하며 건너뛰기도 한다. 억눌린 자, 잃을 것 없는 자의 폭발적인 정신을 반영하는 듯한 현란한 현대무용과 아크로바틱, 비보잉이 이어졌고, 부랑민으로 살며 받은 배척을 태워내는 듯한 클로팽의 강렬한 눈빛과 더 강렬한 목소리가 인상깊었다. 무대와 수평으로 자세를 잡고 손목에 의지해 몸을 빙글빙글 돌리는 댄서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클로팽이 공중에 달린 안전줄에 매달린 채 허리를 젖혀 광기 어린 웃음을 띠며 노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찢어지는 가슴(Dechiré)

페뷔스(Phoebus)의 심리적 갈등을 표현하는 댄서들의 아크로바틱 안무가 압권이다. 남성 댄서들의 휘몰아치듯 강렬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유연한 신체 표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지가 놀라운 속도로 회전하고, 순식간에 점프했다가 무대에 가깝게 몸을 낮추기도 한다. 양팔로 땅을 짚고 몸을 지탱하고는 순간적으로 사지가 공중에 불균형하게 떠 있듯 연출하기도 한다. 또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고통에 억눌리듯 주저앉기도 한다. 페뷔스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댄스 또한 그의 고뇌를 표현하듯 격정으로 치닫고, 피할 수 없는 고민에 몸부림치는 것도 같고 무언가를 뜨겁게 갈망하는 것도 같은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선보인다. 온몸의 근육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피가 끓는 생동감이 육체로 완전히 표현된 것 같았다.      




2. 독특하고 매력적인 곡조와 노랫소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었고, 스페인 곡조가 들어간 곡들이 특히 좋았다. 배우들의 훌륭한 노래도 인상에 남는다.      


대성당들의 시대(Le Temps des Cathédrales)

극의 해설자이자 음유시인 그랭구아르가 극을 열며 부르는 노래로, 대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장엄한 느낌을 선사한다. 배우 브루노 펠티에(Bruno Pelletier)의 가창력과 호소력도 기억에 남는다. 이 곡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대표하는 곡 중 하나라고도 한다.       

                   

다이아몬드(Ces diamants-là) 

플뢰르(Fleur-de-Lys)의 목소리가, 애정 어린 정서가 느껴지는 빠른 템포의 스페인 곡조와 잘 어우러졌다. 목소리가 아름답고 듣기 좋았고, 배우 줄리 제나티(Julie Zenatti)가 초연 당시 17세였다고 하는데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배역에 참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페뷔스라는 이름(Le mot Phoebus)

에스메랄다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시인 그랭구아르에게 페뷔스(Phoebus)라는 이름의 뜻을 물어보는 곡이다. 잔잔하고도 신비로운 곡조가 에스메랄다의 목소리와 몹시 잘 어울렸고,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나오는 프랑스어 발음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프랑스어라는 언어 자체를 아름답게 느껴지게 하는 노래였고, 에스메랄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 보헤미안과는 또 달리 에스메랄다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곡이었다.      


태양처럼 아름다운(Beau comme le soleil) 

‘페뷔스라는 이름’에서 바로 이어지는 에스메랄다의 노래다. 독특하고 신비로운 음 구성과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아름답다.      


살아가리(Vivre)

극 시작의 서곡 멜로디를 차용한 에스메랄다의 노래이다. 현악기 소리가 숭고하고 극적인 느낌을 만들어 내고, 에스메랄다가 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함으로써 극 전체의 주제를 관통한다. 노래하고 춤추고 웃으며,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주면서 살고 싶다는 에스메랄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감동적이었다.                                                



3. 배우 가루(Garou)의 콰지모도(Quasimodo) 캐릭터 표현     

커다란 덩치에 어딘가 어설픈 듯한 걸음걸이, 야수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독보적이다. 무대 위의 콰지모도는 얼핏 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괴물처럼 느껴져서 무서운 느낌도 드는데, 이 인상을 구현해 내는 표현력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또 거친 목소리로 순수한 진심을 노래할 때 그 임팩트가 압도적이다. 극 초반에는 그저 야수같이 느껴지지만 극이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콰지모도의 순수성과 진심이 더욱 깊이 와닿는다.      


신이여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합니다(Dieu que le monde est injuste)

콰지모도가 감옥에 갇혀 있던 에스메랄다와 다른 방랑자들을 풀어 준 뒤, 에스메랄다를 재우고 나서 부른 노래다.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페뷔스만을 생각하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고뇌와 한탄을 쏟아낸다. 설령 자신이 하늘의 달을 주어도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아닌 페뷔스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며, 결국 아름다운 에스메랄다는 자신과 맺어질 수 없을 거라고 울부짖는다. 콰지모도는 외모와 재력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의 불공평한 세상을 비통하게 외친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음색에 담긴 그의 고뇌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춤춰요 나의 에스메랄다(Danse mon Esmeralda)

이 곡은 죽은 에스메랄다를 보며 슬퍼하는 콰지모도가 자신도 그녀와 함께 죽음으로 하나가 되겠다는 마음을 노래한다. 곡조는 처음에는 담담하고 애상적이지만, 점차 숭고하고 자장가 같은, 조금 천국을 연상시키는 곡조로 전환된다. 그러면서 콰지모도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정적으로 절규를 담아내기 시작한다. 영상에서 “To die for you is not”라는 자막이 나오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다음 장면에 “death”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death”라는 말이 나온 순간 충격과도 같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너를 위해 죽는 것은” 뒤에 이어지는 “죽음이 아니라네”라는 말은 카지모도의 진심을 단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극 시작에 나온 <대성당들의 시대>처럼 감정이 고조되면서 곡의 키도 점차 올라가는데, 그때마다 더더욱 야수처럼 울부짖는 듯한 콰지모도의 노래가 감정적으로 무척 깊은 인상을 남긴다.        

                          



노트르담을 장악하려던 방랑자 무리 속에서 두목 클로팽이 죽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 에스메랄다에게 자신들이 진정한 형제였음을 말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클로팽의 죽음을 맞이한 에스메랄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클로팽이 부르던 방랑자의 노래를 이어 부르며 방랑자들의 선두에 서서 결의를 표한다. 하지만 곧, 에스메랄다가 사랑하던 페뷔스가 직접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페뷔스의 선고를 들은 에스메랄다의 심정은 노래로 직접 표현되지 않지만, 바로 앞 장면에서 진심을 다해 사랑하며 삶을 살겠노라 노래했던 그녀에게 그 선고가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사형대에 오르고 숨을 거둔다. 프롤로에게 협박받으며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도 에스메랄다는 "당신을 개처럼 물어뜯을 거예요"라고 겁 없이 맞서던 인물이었고, 클로팽의 죽음 이후 방랑자들의 전의를 이어받을 것처럼 보였기에 그 죽음이 더욱 허무하게 느껴졌다.     


내용적으로는 소외받는 사람들과 방랑자들의 설움, 그리고 혁명이라는 사회적 요소와 개인의 진솔한 감정이라는 개인적 요소가 잘 엮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 소설의 이러한 부분에 뮤지컬의 연출과 음악이 극적인 느낌을 더해 배가시켜 주었다. 뮤지컬의 모든 음악은 리차르도 코치안테(Riccardo Cocciante)가 작곡했다고 하는데, 54곡이나 되는 노래들을 한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  

         

원작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프롤로와 에스메랄다의 죽음을 목격한 콰지모도가 “아, 나는 저 둘을 모두 사랑했는데!”라고 말한다고 한다. 뮤지컬에서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인지 후반에서는 카지모도의 에스메랄다를 향한 사랑이 프롤로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욱 강조된다.            

                                                           

<보헤미안>이 극의 어떤 맥락에서 나온 곡인지 알고 싶어서 전체 뮤지컬을 본 것이었는데, 극초반에 에스메랄다가 등장하면서 나오는 곡이었기 때문에 극 전체를 통틀어 이 곡이 에스메랄다에 대한 첫 정보였다. 그리고 ‘안달루시아’의 발음이 ‘안달루시’로 들렸다. 마리아(Maria)라는 이름이 프랑스식으로는 마리(Marie)가 되는 것처럼 프랑스어에서는 단어의 마지막 ‘a’ 소리를 ‘e’처럼 발음하는 것 같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또 ‘콰지모도(Quasimodo)’라는 이름도 ‘카지모도’에 가깝게 들렸다.            

       

뮤지컬 동아리에서 ‘보헤미안’을 추천받은 덕분에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작품을 접하게 되고, 그 속에서 많은 훌륭한 면모들을 발견하게 되어 감사했다. 또 프랑스어 영상물을 처음으로 감상하면서 프랑스어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서 차차 공부해 보고 싶다. <노트르담 드 파리>로 인해 얻게 된 배움과 새로운 세계가 내 삶에 앞으로 어떤 변화들을 가져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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