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따갑던 여름날, 바다에 놀러 간 준페이는 물에 빠진 어린 소년 요시오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각자 가정을 꾸린 준페이의 동생들 료타와 지나미는 매년 여름 가족들과 함께 고향집으로 향한다. 다시 올 수 없는 단 한 사람, 준페이를 기리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에 초대받는 또 한 사람, 요시오 역시 매년 준페이의 집을 방문한다. 그 해 역시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모인 가족들로 왁자지껄한 하루가 흘러갈 무렵… 요시오, 그만 와도 되지 않아요? 차남 료타는 어머니에게 그만 요시오를 놓아줘도 되지 않냐는 말을 넌지시 건네고, 엄마는 그런 료타의 질문에 지난 10여 년간 숨겨왔던 진심을 쏟아내는데…
� 감상문 내용 안에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영화 전체를 시청한 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멈춰버렸기에 영원하지만 동시에 유약한 것 – 영화 ‘걸어도 걸어도’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보는 내내 준페이는 영화 속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느껴지며 영화를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준페이가 어떤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는지, 어떤 목소리 톤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는지, 어떤 눈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무것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 준페이는 영화 내에서 집안 어디에나 존재하며 어디에든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연출된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준페이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는 어머니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료타의 어깨 뒤로 준페이의 재단이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연출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준페이라는 존재는 유한한 삶을 가진 사람이고 그 삶은 끝나버렸지만 동시에 영원한 존재로 느껴지기도 한다. 가족들이 있는 한 그들 사이에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나 함께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변질된 회상에 지나지 않는다. “준페이가 그때 그랬었지.”라는 가족들의 단편적인 기억으로 준페이라는 사람을 헝겊으로 기워낸 담요처럼 억지로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준페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야채가게에 다녀오지 말 걸.”이라는 말을 했던 것은 가족들의 기억과 달리 료타이었던 것처럼 걸음을 멈춰버린 사람에 대한 기억은 쉽게 흐트러지고 변질되어 버린다. 결국 죽었기 때문에 영원히 한 자리에서 멈춰버리게 되는 것이다. 고인 물은 쉽게 썩는다는 말처럼 한 곳에 멈춰 고인 준페이라는 존재는 어느새 기존에 존재했던 준페이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화해 버린다. 밤중에 길을 잃었을 뿐인 노랑나비를 준페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어머니처럼 말이다.
처음 영화의 소개 글을 읽었을 때에는 준페이 대신 살아야 했던 요시오나 죽은 준페이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닐까 했지만 영화에서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그중 특히 어머니와 유카리의 관계성이 인상 깊게 남았다. 어머니와 유카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걸어가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카리는 사별을 한 이후 료타를 만나 새로운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있고 사별한 전 남편과 현재의 남편 료타를 분리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가끔 전 남편과의 기억을 아들에게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함께 나비를 잡았던 가장 살아있었던 순간의 기억이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준페이의 모습을 망가진 테이프처럼 반복하는 어머니와는 다르다. 이처럼 어머니는 유카리와 반대로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에 머물게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카리와 그녀의 아들의 존재에게서 은근한 벽을 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원망할 곳이 없는 고통은 더 극심한 법이라며, 요시오를 매 기일마다 불러 죄책감을 가지게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대사 또한 마음에 깊게 남는 대사였다. 잔인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원망해야 할 곳을 잃어버린 감정은 결국 스스로를 향하게 된다. 영화 초반에 준페이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하며 그때 잡았어야 했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자책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의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직접 낳고 키운 자식을 잃은 기억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 아직 가까운 사람과의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가장 큰 상실이었던 것은 10년을 함께 살아온 인생 첫 반려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반려견 '푸돌이'의 어릴 적 사진. 맛도 없을 생양배추를 아삭이며 잘만 먹었다.
반려견의 죽음 이후 나는 그때의 슬픔이 되돌아올까 두려워 반려견의 흔적을 마주하는 것 자체를 회피했다. 그러자 10년간 봐왔던 생전의 살아있던 반려견의 모습이 아닌 죽음 직전의 며칠간의 기억뿐이 남아 분명 행복했을 생전의 추억마저도 아픈 기억으로 변화해 버렸다. 그 자리에 멈춰버린 것은 결국 멈춘 당시의 기억을 가장 강렬한 마지막으로 한 채 정말 진실된 생의 모습을 잊어버리게 한다는 점이 애석하게 느껴졌다.
생이 끝내버려 멈춰 선 사람은 이렇게 영원한 박제로 남아버린지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계속 걸으면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영화 속 요시오와 료타는 죽은 준페이의 몫까지 해야 한다는 짐을 가지고 있지만 방황하는 채 제대로 뭔가를 해내지 못한 데칼코마니 같은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살아서 죄송하다며 서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요시오에게서 료타는 유일하게 동정심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죽어버린 준페이와 달리 요시오와 료타는 아직 살아있는 생명이자 사람이다. 걸어도 걸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 순간에 묶여버린 가족들과 달리 앞으로를 걸어갈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결국 끝까지 함께 축구장에 가지 않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와 죽을 때까지 싸웠던 어머니, 그리고 은근한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들의 의지로 아이를 가진 료타 부부. 이 둘의 차이점을 보았을 때 그럼에도 결국 바뀌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걸어가는 삶이 아닐까 싶다. 멈춰버린 삶은 너무나 쉽게 변질되지만 자신의 의지로 걸어가는 삶은 결국 누군가의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