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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개돌개 Nov 03. 2024

사랑, 색色을 넘어 계悈가 전복되는 비이성의 순간.

영화 '색, 계'를 보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채 이어지는 연극이 끝내 막을 내린다면 그 결말이 죽음이라도 홀가분 할 것이다. 왕자즈의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문장이 아닐까. 시대적인 상황에 떠밀려 어디론가 정해져 떠나가는 남자들을 오히려 부러운듯 바라보며 스스로 어디로 떠나야 할지도 정하지 못했던 왕자즈는 내내 애매모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된 연극을 시작하는 것 또한 친구의 옆에서 얼떨결에 연극 동아리에 영입되어 시작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완벽한 연기를 해내는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지만, 그 시작 또한 스스로의 의지는 없었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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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 ��������ㅣOSTㅣ음악ㅣTHE HANDMAIDEN ORIGINAL SOUND TRACKㅣお嬢さん オリジナルサウンドトラックㅣ한국영화ㅣ박찬욱 감독 (youtube.com)


영화 '색,계'를 본 후기, 근데 아가씨 ost를 곁들인...

같이 들으면서 보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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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정하는 바 없이 흘러가기만 했던 인생 속에서 왕자즈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을지 모른다. 내가 누구였는지를. 더 나아가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는 존재라는 사실을. 왕자즈는 그저 자신이 연극을 통해 타인의 삶을 연기할 때에만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이다.

독립운동에 큰 관심도 열정도 없었지만 얼떨결에 성공해버린 연극 동아리는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 '이'를 암살하기 위한 독립운동 본부가 되어버린다. 왕자즈는 그렇게 현실이라는 연극에 올라 막부인을 연기하게 된다. 하지만 그 행동 내에 담긴 대의는 차치하더라도, 독립운동 본부의 방식은 왕자즈라는 개인에게는 다소, 지나칠 정도로 폭력이다. 아무런 상의조차 없이 그녀가 '이'를 사로잡아 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하기 위해 그녀를-영화 내 왕자즈의 표현을 적나라하게 빌리자면-창녀로 팔아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그녀의 첫경험을 본부의 아무개와 가지게 한다. 의견은 분분할 수 있겠으나 애초에 성적인 몸의 서사를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고백하자면 그래서 영화 내의 배드씬도 거의 보지 않았다.) 이것이 대의라는 이름의 가스라이팅과 자기 의사를 가지지 못하는 왕자즈라는 취약한 여성을 통해 어거지로 얻어낸 성적 관계의 동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왕자즈를 이용하기로 한 쾅위민이라는 인물이 그렇기에 '이'보다도 악역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왕자즈는 끝내 자신의 첫경험을 어거지로 이성적 감정 하나 없는 동료와 보내게 되었음에도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한다. 공기가 가라앉은 가운데 버석하게 그려지는 영화의 첫 배드씬 연출은 왕자즈의 마음처럼 그저 무겁고 버겁기만 하다. 이미 그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녀를 둘러싼 연극 무대는 쉴세없이 돌아간다. 마치 주인공이 퇴장한 연극 무대 위에 어둠이 내린 사이, 모든 장치와 배경이 바뀌어버리고, 주인공 배우는 문득 다시 그곳에 떨어져 버리듯... 그녀를 뺀 모든 사람들은 결정을 내릴 뿐이며, 그녀는 결정에 따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암울한 세상이라는 무대는 왕자즈를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 암살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이전에, 이미 왕자즈의 첫경험과 성적 결정권조차 대의라는 이름의 권력 앞에 빼앗긴 상황에서, '이'는 출장을 이유로 해외로 떠나버린다. 게다가 내부 분란으로 인해 살인까지 일어나버리며 왕자즈는 대의라는 단어에 매달려 스스로 이 연극을 떠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마치 도박 중독자들의 심리와도 같았을 것이다. 이미 소모해버린, 희생해버린 나의 어떤 시절과 시간.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그런 것들을 모두 털어버리고 훌훌 자리에서 일어나버리기란 그 어떤 이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3년 뒤, '이'가 다시 막을 걷고 등장했을 때 왕자즈는 기어코 자진하여 '막 부인'으로서 연극 무대 위로 올라선다. 만약 정체가 발각되거나 죽을 상황이 된다면 깨물어 삼키라는 알량한 선의로 건네진 독약처럼, 그들의 선의는 왕자즈를 행하고 있지 않으며 끝내 죽음을 가져올 것을 알면서도 왕자즈는 연극의 막을 내리기 위해 끝내 무대로 오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스로 이 무대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막 부인'과 '이'와의 관계는 색으로 이뤄져 있음에도 점점 깊어져 간다. 연기를 이어가는 나날들이 길어지며 왕자즈는 끝내 완전한 몰입을 이뤄낸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 또한 단순히 색을 탐하는 관계였음에도 그 순간만큼은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민족을 배신하고 암살 위협에서 살아가는 그에게 왕자즈의 헐벗은 몸은 아무런 위험요소조차 숨기지 않았음을 뜻했을 것이다. 그 안에서 펄떡이는 맥박이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들 중 아무도 알지 못했다.

왕자즈는 막부인이 된 이후로 '이'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인해 괴로워 한다. 언제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그녀였기에, 끝낼 수 없고 끝내서도 안되는 가짜 감정은 그녀의 안에서 더 큰 충돌을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왕자즈는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그녀의 안의 막부인과 왕자즈의 충돌로 인해 그녀는 한 순간에도 두 개의 뇌를 통해 감정을 느끼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결국 그의 사랑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 다가온다. 암살이 진행되기 직전,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끼워주며 "내가 당신을 지켜줄께." 라고 말하는 '이'의 눈빛을 본 순간이다. 지나칠 정도로 큰 다이아몬드와 부인이 있음여도 그녀를 진심으로 지켜주겠다 말하는 그의 행동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기어코 막 부인은, 왕자즈는 이것이 사랑이었음을 읹어하게 된 것이다.

색이라는 몸의 감정을 뛰어넘어, 계라는 이성까지 정복되었을 때 우리는 끝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아, 나는 그럼에도 이성적인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하며 말이다. 쉽게 말해, 사랑의 끝은 비이성적인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비이성적일 정도로 커다란 다이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너를 지켜주겠노라 말하는 그의 눈빛에서 더 이상 색의 사랑이 아닌 계의 사랑, 이성의 사랑을 느낀 그녀는 탄식한다. 이성을 정복한 감성은 끝내 참아지지 못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사랑이란 이렇게나 비이성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성을 넘어서는 사랑의 힘을 끝내 다시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도망쳐요." 이것은 왕자즈가 그녀의 삶에서 처음으로 내린 결정이다. 무대의 막을 내리는 클라이막스가 진행된다. 오로지 그녀의 선택에 의해 이뤄진 첫번째 일이었다. 도망치는 '이'와 평온하게 거리를 나서는 그녀. 왕자즈의 얼굴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옷깃에 숨겨놓았던 독약을 꺼내지만 삼키지 않는다. 안온한 웃음이 그녀의 입술 위로 번질 뿐이다. 세상은 계속 흘러간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이성과 감정의 전복이 이어지는 상황은,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스스로의 뇌를 두개로 분리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끝낼 수 없고 누군가 끝내주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왕자즈 또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결정을 내렸다.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걸린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이어져 가던 연극은 그렇게 끝을 맺게 된다. 사랑의 끝이자 그녀의 삶의 끝이지만,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난 머리는 그렇게 고요해진다. 그렇기에 드디어, 이성의 전복으로 인해 끝내 하나의 마음을 가지게 된 왕자즈는 비로소 평화로웠을 것이다. 고요한 마음이었기에, 미소에서 오는 안온함은 모든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그녀를 아주 깊은 어둠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난 결말로 이끌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왕자즈는 마지막에 이르러 연극을 처음 시작하게 된 날, 세트장 위로 오른 자신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무대 위로 올라와야 했던 순수하기만 했던 자신을...

그녀가 처음으로 내린 결정은 그녀를 석탄광에서의 처형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쾅위민의 얼굴에는 거사를 망친 왕자즈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왕자즈 또한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는 쾅위민을 미워하고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무대가 끝이 난 이 시점에서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던 무대 위 조명도, 관객도, 심지어는 그녀가 사랑하는 이도...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웃으며 죽음을 맞이 한다.

대부분은 '색, 계' 라는 이 영화를 적나라한 배드씬으로 기억하겠지만... 나는 인간의 사랑과 생명력을 사랑하는 글쟁이인 만큼, 끝내 이 둘의 사랑과 그 안의 색과 계에 집중하게 된다. 사랑이란 결국 인간의 근간인 이성을 무너트리고 자라나는 것이기에 그만큼 더 큰 생명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여러 논란과 오명이 많은 영화이지만 끝내 이성과 사랑의 끊임없는 정복 속에서 아무런 결정조차 하지 못한 자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끝을 맺게 되는 그 순간의 힘에 집중해 영화를 바라고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렇다면 단순히 선정성이 높은 영화로만 기억에 남기엔 아쉬운 영화라는 생각에 공감하게 될 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이 영화의 배드씬을 보기가 좀... 무섭긴 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라면 먹으면서 거실 티비로 틀어놓고 보다가 엄마한테 걸릴 뻔했다. 이 나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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