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너무나도 청춘 그 자체인 그 시절.
나는 더 나은 배움을 찾아 시베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잠깐 다녔던 한국의 대학에선 전공수업이 일주일에 15분, 그나마도 나에게 관심 없는 강사와의 시간이었다.
당시 나를 비롯한 4명의 담당이었던 강사는 좋은 학교출신의 인재였지만,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고, 매일 지각에 병든 닭 같이 앉아있다가 돌아갔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판단했고,
젊음을 무기 삼아 나는 덜컥 러시아 유학행을 선택했다.
당시 러시아어 알파벳하나 모르고 도시이름하나 딸랑 알았던 나는 인터넷에서 도시이름을 찾았다.
몇 개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글 하나를 클릭했다.
"크라스노 야르스크, 그곳은 지옥이었다." 로 시작하는 그 글은 포로로 잡혀간 누군가의 글이었다.
많지도 않은 정보 중에 하필 이런 글이라니...
살포시 끄고 더이상 읽지 않았다. 이미 한국에서 질릴대로 질린 음악생활에 이보다 안 좋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아빠와 동네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헤어지면서도 나는 담담했다. 마침 또 공부하고 싶어서 한번 방문해 보겠다는 오빠 한 명과 그 어머니, 그들의 인도자로 동행한 중학교 때부터 쭉 가르쳐주신 선생님과 함께여서 막 슬프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샘은 엉뚱한 타이밍에 터졌다. 인천공항에서 유학생이라 잔뜩 실은 짐의 오버차지를 물었다. 함께 가는 동행인이 3명이고 그들은 잠시방문했다 나올 계획이라 내 짐을 자기들이 부쳐주겠다 했으나 그들의 짐이 생각보다 많아 오버차지가 나왔던 것이다.
공중전화로 인천공항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며 나는 숨도 못 쉴 만큼 엉엉 울었다.
"오...오버....흐끅...차지....엉엉엉~!!!"
엄마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잘 안 울던 딸이 너무 울어서 본인도 눈물을 엄청 흘렸다 하셨다. 저런 내용인 줄 꿈에도 모른 채...
러시아에 들어간 뒤 나는 1,2년에 한 번씩 한국을 나왔다 들어갔는데 절대 오버차지를 낼 만큼 짐을 많이 들고 가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좌충우돌 시베리아 생활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