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 Jul 08. 2024

5.8 임시직 VP 그리고 이직

나는 코로나 시기를 거의 겪어보지 않았어.

호주에서는 코로나 초기에 바로 국경을 막았고 2주 정도인가 락다운을 한 게 전부야. 그 이후로는 일일 확진자수가 5명을 안 남었어 그것도 다 외국에서의 입국자. 그래서 한참 코로나로 세계적으로 난리이던 2020년에도 나는 회사에 출근했고 여행도 다니고 극장도 가고 마스크도 안 쓰고 자유롭게 살고 있었지.

미국으로 귀국을 준비할 때 가장 걱정되었던 거는 코로나였어. 하지만 내 걱정과 다르게 2021년 4월의 미국은 이미 백신이 다 보급되었고 기다림 없이 바로 백신접종을 받을 수 있었어. 그와 함께 사람들도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중이었지. 딸이 앞으로 다닐 학교도 정하고 (온라인 수업이 아닌 오프라인수업을 재게 한 학교였어) 자동차도 사고 집도 구했지.

사람들도 슬슬 마스크를 벗기 시작하고. 여러 나라들이 슬슬 국경을 열기 시작했고 호주도 몇 달 지나지 않아 국경을 열었어. 하지만 아직 백신 접종률이 높지 않았던 호주로써 결국 급증하는 확진자수에 호주는 락다운에 돌입해. 결국 나는 가장 어려웠을 때는 호주에서 편하게 있었고 미국이 백신을 통해 회복하고 있는 때애 귀국을 한 거야. 운이 좋았지.

귀국후 3일만에 백신접종 완료


오래 살던 미국이기에 이미 지인들도 많고 귀국 후의 적응은 쉬웠어. 호주에 처음 갔을 때 모든 브랜드가 생소하기에 보험가입, 통신사가입, 전자제품구입 모든 것들이 조사와 노력을 요구하는 노동처럼 느껴졌던 것에 비해서 미국은 거의 모든 것을 귀국 2-3일 안에 해낼 수 있었지. 하지만 일적으로는 잘 풀리지 않았어. 12월 31일까지의 임시직 VP로 온 나에게 다른 VP롤을 찾아야 하는 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


미국에 오면 다 해결이 되겠지 그래도 미국 내에서 본사에 아는 사람도 많은데 막연히 사람들이 챙겨주겠지 기대하던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


전편에도 이야기했듯 내 스폰서들은 이미 사업부를 옮겨있어서 크레디트 리스크 부서에 계시지 않았고. 특히 나를 밀어주던 D 씨랑 약간 대립관계에 있다던 E 씨가 조직의 최고리더였어. 여름쯤 내 전문분야인 Pricing VP롤 이 나왔을 때 난 당연히 내가 지원하면 될 거라고 생각을 했어. 이미 회사 내에서 pricing 전문가라는 브랜드가 있었고 같이 일하는 파트너들도 다 나를 알고 지지해 주니. 하지만 내가 지원하려고 하자 E 씨가 나를 막았어. 회사 내에서 이 포지션은 요새 한참 중시하는 Diversity를 고려한 아시아나 흑인계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그 후에도 내가 리스크 안에서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포지션을 지원하려 할 때도 비슷했어. 지원을 해도 채용담당자의 반응이 마치 말은 안 해도 하지 말라고 뜻이 전해지는. 말 그대로 나는 크레디트 리스크부서에서 버림을 받은 거나 다름이 없었어.


그리고 코로나 시기라 출근을 하지 않았어. 출근이라도 했다면 오다가다 얼굴 보며 이야기하고 네트워킹을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데 리모트로 일하는 상황에서 모든 일을 30분짜리 미팅을 잡아서 해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


이때가 정말 힘들었던 시기야. 호주에 있을 때는 미국 오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름 잘한다고 했던 인맥들이 힘을 써줄 줄 알았는데. 이때부터 손과 발이 저리기 시작하더니 2021년의 여름에는 거의 반신이 마비되는 느낌으로 오른손, 발이 모두 너무 아프기 시작했어. 병원에서는 목디스크라고. 너무 아파서 눕지를 못할 정도 원래 똑바로 누워서 자는 사람인데 공벌레처럼 옆으로 누워서 몸을 동그랗게 감고서야 만 잠을 잘 수 있었어. 한의원, 물리치료, 뼈 맞추기, 정형외과 정말 많은 치료를 받았는데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인지 별로 차도가 없었어.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21년의 여름에 폭풍으로 인한 단시간에 엄청난 폭우가 내린 적이 있어. 귀국 후 새로 산집에 이사한 지 3일 만에 집이 침수당했어. 가뜩이나 몸도 아픈데.. 이제 집까지 고쳐야 하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겹쳐서 몸이 아팠던 거 같아.

코로나기간 정말 사람이 없던 타임스퀘어


가을이 되어서도 내부적으로 해결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어. 이제 정말 A사를 떠나야 할 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 가장 먼저 생각이 난사람이 S씨야 (4.5편에서도 이야기한). 호주 가기 바로 전에 나의 보스였고 내 롤모델인 D 씨랑 리더십 스타일이 가장 닮은. 자기 밑에 일하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흥보하고 대우도 최고로 해주기 위해 노력하던. 그를 통해 사람들이 더더욱 그분의 밑에서 일하고 싶게 만드는.


S 씨는 현재 미국시중은행 탑 3에 해당하는 J사에 소비자금융 카드사업부의 Managing Director로 자리를 옮긴 지 1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고. 호주에 있을 때부터 분기당 30분짜리 미팅을 계속해오고 있었어. 안 그래도 A사에 옮길 때 1년 동안 A사의 인재들을 빼어가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거의 끝나가고 있기에 연락을 해 보았지.


S 씨는 A사에도 인맥이 많고 이미 현재 내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밑에 곧 Executive director라는 신용한도조정을 하는 자리가 나올 거라는. 업계에 오래 있었기에 새 고객 승인하는 자리랑 함께 한도조정 자리는 크레디트 리스크분야에서 가장 중요도랑 관심도가 높은 자리라는 건 알지. 되게 좋은 자리인 건 분명하고 인터뷰를 보면 패스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어. 하지만 J사는 주 3일 출근을 요구했어 그것도 소비자사업부의 본사인 델라웨어주의 윌밍턴이라는 도시로. 뉴욕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야.


나는 불과 몇 개월 전에 뉴저지에 집을 샀어 침수피해도 입었기에 정말 돈 많이 들여서 지하부터 2층까지 싹 리모델링도 해놓은. 우리 딸도 호주에서 전학 와서 학교에 다닌 지 2학기 째. 걱정보다 친구들도 잘 사귀고 너무 적응 잘하고 있고. 와이프도 D사에서 오피스 트랜스퍼로 시드니에서 뉴욕오피스로 옮겨온. 나만 빼고는 모두들 다 적응을 잘하고 있는데..


힘들 때 결국 마음에 위안을 주는 건 가족이었어. 내가 스트레스에 디스크에 힘들어하는 걸 봐왔던 와이프는 흔쾌히 J사에 가라고 응원을 해줬어 집이야 우리 딸 학교야 아직 어리고 또 회사에서 사고파는 걸 지원해 준다면 작은 일이라고 오빠의 커리어가 가장 중요하니 믿을만한 보스에 좋은 포지션이라면 안갈이유가 없다고.

호주에서 짐이 도착하기전 우리는 가구도 없이 텅빈집에 텐트를 쳐놓고 살았어. 너무 고생많았을텐데 고맙네

그렇게 나는 J사에 인터뷰를 보았고 오퍼를 받았어. A사에서는 Layoff형식으로 12월 31일에 포지션이 터미네잇되었고 J사에 2월 1일부로 출근하는.




작가의 이전글 5.7 다시 미국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