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서 느려지는 게 아니예요!
지금은 주름이 자글자글 하고, 매일 하는 소리가 "이제 새로운 걸 배워 뭐하게" 하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어릴 적에는 지금 젊은이들 처럼 새로운 것에 열광하고, 배움이 어렵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섞여 사는 것도 너무나 자연 스러웠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아버지도 젊은 시절에는 모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쉬웠습니다. 에너지도 넘치고 움직이는 것도 빠릿빠릿 했지요.
네, 나이가 들면 몸의 에너지도 예전같지 않고, 같은 얘기를 듣고, 같은 행동을 하려고 해도, 느릿느릿 해 집니다. 그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어요.
그런데 왜 느려질까, 궁금한 적 있지 않나요? 그냥 단순히 젊은 시절보다 에너지가 부족해서 일까요? 신체의 신진대사가 느려져서 그 행동이나 배움도 느려지는 걸까요? 물론 근육에 한해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은 쇠퇴하고, 근육 자체의 세포 분열속도 자체가 근육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면 운동을 조금만 해도 근육의 질과 양을 보존할 수 있는 데 반해, 나이가 들면 쇠퇴한 근육의 양을 같은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바쁜 삶을 영위하느라 근육운동을 하지 못했을 때 몸이 점점 줄어드는 겁니다. 근육이 줄어들면 에너지가 줄어들고, 결국 움직임이 조금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근육의 쇠퇴와 뇌의 쇠퇴를 동일시 하곤 합니다. 실제로 뇌는 이런 식으로 쇠퇴하지 않는데 말이지요.
뇌세포는 초반 약 3살 때까지 분열을 끝내고 해당 분열된 세포들을 연결하고 더욱 복잡도를 높여가는 방향으로 바뀝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부분은 수명을 다하거나 충격에 의해 사멸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아무리 들었다고 하더라도 뇌세포 자체의 수명이 다하는 일은 드뭅니다.
그렇다면 대체 나이가 들면 배움의 속도는 왜 줄어드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의 뇌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실 이미 경험한 것에 대해 결론을 내는 것은 더 빨라집니다. 이는 같은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사회 초년생이 쩔쩔매는 문제를 오랜 경험을 갖고 있는 직장 상사가 와서 슬쩍 보고는 바로 답을 내 놓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회 초년생이 모르는 문제여서 그렇다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다 배운 지식들인데도 사회 초년생들은 그 "이미 배운" 지식들을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해결할 수 있겠지요. 새로운 것을 더 배워서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이미 배운 지식들을 이리 조합하고, 저리 조합하면서 알아내는 겁니다. 그런데 각 지식의 항목을 하나 하나 말하라고 하면 직장 상사들이 그 지식들을 교과서 그대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 기억하고 있는 그 지식들이 "최적화"가 되어서 문제 해결을 순식간에 할 수 있죠.
그럼 대체 배우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배우는 속도와 이미 배운 것을 사용하는 속도가 차이가 나나요?
네... 조금은요. 그런데 그게 배우는 속도를 이렇게까지 느리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문제는 기존에 이미 쌓아온 것이 많아서예요.
예를 들어보죠.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야겠다, 하고 나갈 때 어떻게 하나요?
네. 그냥 문을 열고, 나가고,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놀이터로 향하죠.
그런데 어른들은 어떻게 하나요?
네. 나가기 위해서 문을 열기 전에, 열린 창문이 있나 보고, 가스가 닫혔나 보고, 불을 끄고, 핸드폰 챙기고, 열쇠 챙기고, 문을 닫고, 마지막으로 뭐 빼먹은 것 있는 지 한 번 더 생각한 후에 나갑니다.
벌써 감이 오신다고요? 네. 맞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경험이 많은" 뇌에서는 항상 일어납니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새롭게 습득한 정보가 기존에 있던 정보와 비교/대조를 거쳐서 새롭게 가공되는 과정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존의 정보"의 양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놀이터에 가자"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얼핏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빠른 시간 안에 "놀이터->재미있는 곳"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바로 문을 열고 나갈 준비를 하겠죠. 경험이 점점 늘어날 수록 신발도 신으려 할 테고, 아끼는 인형도 가져 가려 할 겁니다.
반면, 아이와 함께 놀이터를 가야 하는 엄마들은 어떤가요?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될 겁니다. 위와 같은 아니면 보다 많은 양의 연관된 사고가 각각 "좀 쉴 수 있을까?", "아이가 다쳤는데", "아이가 목이 마를 수도 있지", "가스불은 꺼야지", "더러운데", "알러지는", "감기 걸린 애가 오면 어쩌지", "지나가는 강아지가 물 수도 있어", "변태도 있다던데", "주변에 큰 애들이 너무 심하게 놀면", "차가 지나갈 때 애가 뛰어가면"... 등 등. 수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 옵니다.
아이들의 신속한 행동과는 달리, 엄마들은 느릴 수 밖에 없습니다. 딱히 생각한다고 뭔가 달라지는 생각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저러한 생각 흐름들은 일어날 것이고, 드디어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비교도 할 수 없이 긴 시간이 흐를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모두 인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살아가면서 쌓은 수 많은 경험은 아주 조그마한 연관 관계라도 있으면 거미줄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위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 하나만 보자면 거의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라는 과정을 거칠 때 이 기억들은 흐름 상 연관성을 가지고 연결되며, 나이가 들면(정확하게는 경험이 많아지면) 이 연관성의 복잡도는 더욱 증가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까지의 복잡도 증가는 정보의 흐름 효율성을 증가시키고, 입력에 의한 복잡한 연관과 흐름을 동시에 처리하여 결론까지 빠르게 이르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소위 "육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하거나 오랜 시간동안 비슷한 영역에서 수 없이 많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조짐조차 알아채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람들은 마치 미래를 읽듯이 다음에 발생할 일을 "느낄 수" 있죠. 예전에는 육감이라는 것이 초능력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뭐, 일반적인 능력을 초월하니 "초능력"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지는 모르겠지만, 초월적이거나 비과학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사실 "육감"이라는 단어는 틀린 말인 거죠. 모두 기존의 "오감"에서 종합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 저장된 방대한 경험을 통해 "해석"된, 따지고 보면 다른 감작정보 처리와 다를 바 없는 활동인 겁니다.
어르신들이 "비가 오려나" 하는 말을 하곤 하는데, 우스개소리로 "뼈마디가 쑤신다"라고 하기도 하고, "구름이 딱 비가 올 것 같은 모습이네" 하기도 하고, 제각각이지만, 그건 자신의 느낌을 해석하기 위해 일부 공통적인 현상에 대해 언급하는 것일 뿐,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살아 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쌓여 온 경험이 주어진 작고 수많은 정보를 취합하여 내 놓는 예측일 뿐입니다. 실제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슈퍼컴퓨터보다 우리 할머니 무릎이 더 잘 맞는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특정한 부분에서만 육감이 발휘되면 좋은데, 나이가 들면 이 육감이 시시 때때로 발휘됩니다. 다 맞으면 정말 초능력자가 되겠지만, 이 육감이라는 "초능력"의 가장 큰 약점은 이게 어디에서 오는지 알기가 힘든 만큼, 여러가지 반대되는 "육감"이 발현된다면, 그 중 어떤 것이 맞는 지 알 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물에 들어갔는데 "차가운" 느낌과 "뜨거운" 느낌을 한꺼번에 느낀다면, 이 물이 차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 손을 빼야 하는지 그냥 둬도 되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역설적으로 너무나 빠른 "다양한 결론"은 결국 아무런 행동으로도 이어지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좀 너무 나갔다고 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분들이라면 더더구나 그럴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여기서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논의하지는 맙시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인공심장과 같은 인공 장기로도 동작하는 "일부는 대체 가능한" 움직이는 구조체이고, 세세하게 들여다 보면 세포라는 생체기계의 상호작용으로 유지가 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세포 하나를 가지고 "생명체"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우리의 과학은 이미 간단한 "세포"를 만들어 내는 수준에 도달했고, 세포가 스스로 움직이고, 주변과 상호작용 하면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낸다면, 언젠가는 생명체를 만들어낼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것 역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인간도 기계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입력"과 "출력"이라는 기본적인 기계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서 계속적인 움직임의 동력을 얻고, 어떤 자극에 의해 "기억"을 만들어 내거나 어떠한 물리적인 "행동", 즉 "동작"을 하니까요.
이런 면에서 중앙 처리 컴퓨터의 역할을 하는 뇌는 우리의 오감, 즉 입력을 통해 들어 온 감각 정보를 통해 점화 되거나 이전에 시작된 전류 흐름, 또는 우리 몸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장기의 움직임등에 의해 자극되어 결국 어떠한 "기분"이나 "영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 기분이나 영감은 우리의 행동을 만들어 내는 중간자(middleware) 명령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들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극"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건강한 환경에서 주어진 자극으로 "정상"동작하던 인체는 기존에 주어진 자극으로 인해 "저장"된 "기분"이나 "영감"이라는 동력원을 점차 잃어갈테고, 결국 "오동작"을 일으키게 됩니다. 소위, 미쳐 버리는 거죠.
너무 인간을 기계처럼 묘사했나요?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빼고 본다면, 인간이 기계와 다른 것이 우리가 인간이기에 내가 속한 그룹을 우선시 해야 한다는 당위성 이외에 또 존재할까요?
저는 지금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충격을 통해 제대로 보고 나은 방향을 찾아보고자 하는 거죠.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던,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무언가 신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빼고 본다면, 기계의 문제를 우리가 고칠 수 있듯이 우리의 문제를 고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게 됩니다.
제 글이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인간은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다른 동물을 도살할 가치가 있는가? 살인은 나쁜 것인가? 뭐 그런 걸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는 그런 것 1도 신경 안씁니다. 결국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중요한 거죠.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에 속해 살아가고, 사회를 위한 선이 무엇인가를 묻는다고 해도 제 답은 같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남에게 해가 되고, 남이 하고자 하는 것이 나에게 해가 된다면, 그 중간을 찾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적당하게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고, 거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 위한다는 명분도 필요 없고, 절대선과 같은 판타지도 필요 없습니다. 다수에 속해 있는 내가 소수가 될 수도 있고, 소수에 속해 있는 내가 다수가 될 수도 있죠. 힘이 있는 내가 그 힘을 잃을 수도 있고, 젊은 내가 늙을 수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지금 당장 내 삶이 힘든데 남들까지 걱정하며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내 자녀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갈 것인지만 생각해도 쉽게 답을 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정답은 없지만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을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것은, 인간이 스스로 다른 짐승들과 달라야 했을 때 만들어진 개념일 뿐입니다. 짐승들과 구분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법이 있고, 과학이 있으며, 문명인으로 키워줄 교육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제 미망에서 조금 벗어나서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삶의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찾느라 존재하지 않는 마법적인 방법을 찾기보다 더 현실적으로,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리에 입각해서 방법을 찾아 보자는 겁니다.
이어지는 화에서는 각각의 "나이가 들어 느려지는" 상황들과 그에 맞는 "느려짐을 피하는" 방법들을 알아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