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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영 Aug 30. 2024

나에게는 어떤 의미 있는 우연이 있었을까

- 아등바등 살아오다 마주친 기막힌 우연

  인생은 언제나 계획과 준비가 있어야 되는 줄 알았다. 중간고사 대비반, 예비 고1 준비반, 수능 대비반으로 늘 대비하며 준비하며 살았다. 대학 입학 후에도 교직이수 자격을 얻기 위해 입학하자마자 학점 관리를 해야 했고, 취업을 위해 자격증을 땄어야 했다. 결혼을 하려고 소개팅을 잡기도 하고, 직업을 바꾸기 위해 수험을 치러야 했다. 늘 그런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달성을 하든 못하든 어떠한 '준비'를 했었다. 내게는 진학도 취업도 결혼도 다 계획하고 대비하고 준비해서 겨우 겨우 달성해 보는 일종의 미션 퀘스트 깨기였다.


  어느 모임에서 책을 만드는 편집장님과 대화를 했었다. 책을 만드는 사람과 처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더욱 대화에 몰입했다. 그녀는 그 일을 하는 게 너무 좋아서 길 가다 혼자 웃기까지도 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자기 일을 저렇게나 사랑할 수 있다니 너무 신기한 마음에 "편집장님은 어떻게 편집자가 되셨어요?" 질문을 했다. "아, 그게 되게 우연히 하게 되었어요. 저는 편집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우연찮게 시작하게 됐는데 저랑 너무 잘 맞았어요."


  너무 큰 충격이 왔다. 우연이라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니, 심지어 그렇게 시작한 일이 저렇게나 마음에 들다니 나는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메뉴가 맛있었고 우연히 들은 노래가 꽤 듣기 좋았던 이 정도만이 내가 겪은 우연의 행운이었다. 저만큼 의미 있는 우연이 내게는 왜 없었을까? 나는 왜 늘 힘들게 계획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아등바등 달려왔나 스스로가 안쓰러웠다.


  보통 도서관에 가면 오늘 대출하려고 정해놓은 책 목록들이 있다. 대출가능 상태를 확인하고 도서관에 가기 때문에 책 제목과 표지를 보다가 우연히 대출해서 끝까지 읽어나가는 책은 잘 없다. 어느 날엔가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책을 한 권 빼들었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라는 제목의 연한 살구책 책이었다. 도대체 또 어떤 작가가 자기의 글쓰기 솜씨를 뽐내려고 자랑을 늘어놓았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글 몇 편을 읽었다.


  단숨에 읽어나갔다. 글솜씨 자랑은 한 줄도 없었다. 작가는 자신의 구원 수단으로 글쓰기를 활용했다는 일종의 자기 고백 같은 내용이었다. 그때 나는 글쓰기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그 책을 읽은 게 아닌데 처음으로 글쓰기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그렇게 심오하게 각을 잡고 쓰는 것만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작가가 건네는 위로를 고이 전해받은 후 그의 다른 책들도 읽으며 그의 애독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글을 한번 써볼 수도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용기만으로 실천할 수는 없었으나 몇 년 후 그가 여는 글쓰기 모임에 또 우연히 합류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우연이었다. 그 책을 어디서 추천받지도 않았고 그때는 그 작가의 이름도 몰랐을 때였다. 우연찮게 빼든 책이 내가 글을 쓰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마주친 책 한 권과 글쓰기로 이어진 작은 인연이 어쩌면 내 삶을 기록하고 구원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기대해 봤다.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냐는 물음이 온다면 정말 "우연찮게 책 한 권을 봤고 몇 년 뒤 또 우연찮게 그 작가의 글쓰기 모임을 신청하게 되었어요."라고 답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 상상만으로도 그간 아등바등 살며 좌절하고 긴장했던 순간들이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기막힌 우연으로 글쓰기는 시작되었고 이제는 내 몫으로 꾸준하게 이어가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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