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용에서 진정성으로
일반계 고등학생에게 입시와 생기부(학생생활기록부)를 빼면 학교생활에 무엇이 남을까? 'K고딩'은 학교에서 하루 종일 너무 바쁘다. 수업, 수행 평가, 지필고사, 그리고 탐구 활동 등을 쉴 새 없이 해야한다. 물론 수능 준비도 빠짐없이 해야 한다. 그 와중에 학교도서관에서 나는 '인문독파 프로젝트' 참가자를 모집했다. 인문학 도서를 꾸준히 함께 읽고 비경쟁토론을 해보는 프로젝트 활동으로 기획 의도는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고 "함께 읽기"의 묘미를 알아가기 위함이었다.
"생기부에 적어줍니다. 전공, 진로 무관하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안내문을 붙이고 홍보하는 기간 동안 학생들이 물어 왔다. "선생님 저는 희망 진로가 공학 쪽인데 이거 하면 생기부에 어디다 뭐 적어 줘요?"
현재 일반계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는 모든 활동은 진로에 연계해야 한다는 강박을 드러낸다. 좀 기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3년 후의 진로와 진학을 미리 설계해서 거기에 맞춤형으로 생활기록부를 완성하라는 것은 어딘지 억지스럽다. 앎과 삶은 배제된 채 입시와 직업과 연봉을 바라보고 고교 3년을 활동으로 채우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가혹하기까지 하다.
학생부 종합 전형(수시모집 전형에서 과목별 등급과 함께 생활기록부의 내용을 함께 고려하여 선발함)에서는 대학 입학 사정관들이 전공적합성, 학업 역량, 공동체 역량을 요소별로 채점하여 학생을 선발한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역량은 나눔과 배려, 리더십, 소통과 협업 능력, 성실성과 규칙 준수의 내용을 평가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들은 특히나 이 전형 요소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으므로 전공과 연관된 전공 적합성만을 따져서 학교 활동에 참여하려는 경향이 짙다.
"성실성과 규칙 준수, 소통과 협업 능력 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활동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율활동이나 개인별 세부능력 및 특기 사항에 적을 수 있습니다.", "공학, 과학, 기술 쪽으로 진로를 정하더라도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융합형 인재임을 어필할 수 있습니다.", "독서를 꾸준히 하고 토론에 참여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학종 공동체 역량에 성실성과 소통능력 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자마자 신청이 폭주했다. 학생들이 인문학 도서를 읽겠다고 너나없이 신청하는 모습을 보니 시작은 주객이 전도되었더라도 일단 기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첫 번째 선정도서는 김완의 <죽은 자의 집청소>였다. 에세이 등 문학류를 거의 읽지 않고 교과 연계 수행평가용 독서만 주로 하던 학생들이라 이 책을 골랐다. 처음부터 철학서적이나 고전문학을 들이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학생들을 책 읽기에 몰입할 수 있는 주특기는 나의 스토리 텔링이다. 시인이 특수청소를 한다는 설정부터가 몰입감을 주는데 그냥 "얘들아, 읽고 감상문 써와"라는 식의 진행은 독서로 몰입하기 어렵다. 저자의 독특한 시선, 표현력, 인간을 평가하기 이전에 이해하려는 노력,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의 삶들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면 너희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고 독려했다.
매주 월요일 점심시간이면 스무 명 가까운 학생들이 책장을 넘기며 집중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면 왠지 모르게 짠한 느낌도 든다. 시간과 여유만 있다면 저렇게나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아이들인데 현실 경쟁에 내몰려 수행 평가와 관련 없는 독서는 사치일 것만 같은 느낌을 항상 안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살짝 내려앉는다.
"쌔앰!!!!!!! 저 다 읽었어요!!!!!!!!! 그래도 되죠?" 나는 진도표를 주고 매주 읽을 분량을 정해주었다. 학생들은 월요일 점심시간에도 읽고 각자 시간을 내서도 읽어오기로 했다. 가볍게 4주 계획으로 안내를 했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일정표랑 상관없이 다 읽었다고 자랑스럽게 도서관으로 뛰어오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오~~~~~~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책장이 휙휙 넘어갔나 봐? 자발적으로 몰입해서 완독 하는 경험을 하다니, 엄청 오랜만일 텐데 축하해!" 말해주었다. 심장이 뛰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적당한 소음과 책장 넘기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공간이 좋다고 말하거나 함께 읽게 되어 기쁘다는 소감을 전해왔다. 책을 읽으며 자살에 대한 편견을 깨기도 했으며 특수 청소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저자에게 응원과 존경을 표현했다. 내용 속 고인의 삶을 함께 유추해 보며 울컥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누군가의 서평이나 독후감을 베껴서 짜깁기한 소감문이 아니고 실제 독서로부터 나온 진정성 있는 소감이었다. 심장이 따뜻해졌다.
수업과 평가와 생기부 작성을 위한 입시 준비 등으로 한창 바쁠 아이들한테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일 뿐이지.'라며 꼰대스러운 사람은 되기 싫었다. 바쁜 일상 그 틈을 공략하여 삶을 깊이있게 느껴보는 시간과 경험을 주고 싶었다. 그 시작은 '생기부 반영'이라는 효용적 가치였으나 이제는 그 너머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프로젝트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 진정성을 오래도록 유지하며 더 키울 수 있도록 함께 읽어 나가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