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각자 몫의 우울을 딛고 오늘을 살아낸 우리에게
삶은 축복인가?
장 사르트르는 인간이 가진 자유는 오히려 형벌이라며, 망망대해 같은 자유 속에서 온전히 개인으로 존재하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라 말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그러한 삶을 선택하며, 그 방향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는 특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끊임 없는 독촉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기도 하다. 다음 스테이지와 성공을 갈망하며,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그것을 이룩하라는 독촉. 자유라는 형벌을 짊어지고, 타인의 시선이라는 지옥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정말 단 한번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영화 < 사소한 슬픔 >은 죽고 싶은 언니 엘프리다(사라 가돈)와 그런 언니를 살리고 싶은 동생 욜리(알리슨 필)의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다. 죽고 싶어하는 언니와 살리고 싶어하는 동생, 삶과 죽음이 끊임 없이 갈등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아동 도서 작가, 욜리. 마음처럼 써지지 않는 차기작에 곧 이혼을 앞두고 있는 가정 생활까지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 욜리에게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적인 커리어, 다정한 남편까지,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보이는 언니가 있다. 언니와 연락을 주고 받을 때마다 욜리는, 한없이 부족해보이는 자신의 현실이 더욱 야속하게 다가오기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언니가 '또' 다시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실 언니 엘프리다는 이미 자살 경력이 있었고, 수 년 전, 아버지 역시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끊임 없이 죽음을 갈구하는 언니를 보러가는 길에서, 그리고 언니와 만나 나누는 대화 속에서 생각한다, 정작 죽고 싶은 건 자신인데, 왜 엉뚱한 사람들이 죽고 싶어서 안달일까.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사춘기 딸과의 매일 같이 전쟁을 반복한다. 여느 날과 같이 전쟁과 같은 언쟁을 이어가던 중, 욜리는 딸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 행복한거지'라는 같은 말을 던진다. 애석한 것은 이 문장은 듣는 자에게, 심지어는 말하는 자에게도 불가해(不可解) 한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뱉는 자신 조차, 매 순간 삶의 불운과 우울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며, 확언할 수 없는 문장에 자신의 동공 또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 테니.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이행하려 노력해봐도 마음처럼 변하지 않는 현실에, 터져나온 욜리의 분노는 딸과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도 전해진다.
욜리는 언니에게 '이 세상을 계속 잘 살아보려는 이유는 왜 찾지 않는 것인가'라고 묻지만, 언니는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일이 왜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떠난다. 사실 욜리조차 답을 찾지 못한 이 질문은, 언니가 떠나고 남은 순간과 추억, 사람들 사이에서 무력하게 부유한다.
영화 < 나의 사소한 슬픔 >은 존엄사와 웰 다잉이라는 소재에서 출발해, 매일 같이 반복되는 불운과 문제적 현실 속에 '삶은 정말 축복일까?'라는 의문을 던지게 만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우리의 이야기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언니가 떠난 후 욜리는 자신의 비극 속에서 예술의 영감을 찾아, 자신의 책을 쓰는데 매진한다. 남겨진 사람들끼리 사소한 슬픔과, 사소하지 않은 슬픔을 모두 털어놓으면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몫의 우울과 슬픔을 딛고 살아낸다. 왜 살아야 하는지,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한 것인지, 답이 나오지 않고, 답을 알아낸다 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 속에서 내일의 슬픔과 불운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화 속 인용된 < 채널리 부인의 연인 > (D.H 로렌스) 의 구절을 전한다.
"우리는 폐허 속에 있으며, 새로운 작은 희망을 갖기 위해 새로운 작은 서식지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피하거나 뛰어 넘습니다. 아무리 많은 하늘이 무너진대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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