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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Jul 25. 2024

아버지와 딸이 탁구공 없이 탁구를 치게 된 사연

일본영화 <실종>

가타야마 신조(片山慎三) 감독의

일본영화 <실종(さがす)>(2021년)을 처음 본 건

한밤중에 영화 전문 채널들을 서핑할 때였다.

어느 채널에서 이 영화의 결말부가 방송되고 있었는데

부녀가 탁구를 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처음부터 봐야겠다는 생각에 제목을 기억해 뒀는데

며칠 뒤에 넷플릭스에 들어가니 영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본 영화는

그해에 본 영화들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영화였다.



<성난 황소(Raging Bull)>의 섀도복싱 오프닝을

흉내 낸 듯한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초반 줄거리를 정리하면 이렇다.

마트에서 좀도둑질을 하다 잡히는 등의

말썽을 치는 아버지가

수배된 연쇄살인범 야마우치를 봤다면서

놈을 잡아 현상금 300만 엔을 받겠다고

딸에게 말한다.

딸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버지가 없어졌다.

아버지가 일하는 공사장을

어찌어찌 찾아가니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 있다.

직접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며 아버지를 찾는 중에

자신을 찾지 말라는 아버지의 문자가 날아온다.

공사장에서 만난 남자는

알고 보니 연쇄살인범 야마우치다.

아버지가 운영하다 월세를 못내 폐업한 탁구장에 간 딸은

탁구장 골방에서 자고 있는 야마우치를 발견하고

둘은 추격전을 벌인다.


말썽꾼 아버지와 근심 많은 딸


일관된 맥락이라고는 없이

툭툭 던져지는 이야기 조각들이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아니다.

영화는 이렇게 가늠하기 어려운 전개의 뒤에 놓인 진실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봉준호의 <마더> 오프닝에서

김혜자가 춘 춤하고도 비슷해 보이는

오프닝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리고 그러다 이르게 된 결말에서

부녀는 탁구를 친다.

공 없이 탁구를 치는 시늉을 하는데

탁구공이 탁구대를 때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데이비드 린치 영화 같은 그로테스크한 장면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찾으려 전단지를 돌리는 딸


이 영화의 탁월한 점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도무지 예측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근차근 타당성을 얻어간다는 것이다.

사토시(사토 지로)가

“찌르레기 씨”(<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의 모리타 미사토)의 옷을

입혀주며 흐느낄 때처럼,

앞에서 등장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 설정들을

영화 뒷부분에 알맞게 활용해

적절한 효과를 얻어내는 솜씨도 장점이다.



매끈하게 맞물릴 것처럼 보이지 않던

퍼즐들의 아귀가 딱딱 들어맞게끔

집필한 시나리오만큼 좋은 건

그 시나리오를 탁월하게 스크린에 옮겨놓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다.


코믹한 역할을 주로 연기한 배우인 사토 지로는

웃음기 하고는 거리가 먼 탁월한 정극 연기를 보여준다.

아내를 죽이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서

절규하는 연기는 압권이다.

느닷없이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다닌 끝에

아버지를 찾아내고 행복한 삶을 되찾지만

곧이어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

중학생 딸을 연기하는 이토 아오이와

변태 성향의 연쇄살인범 야마우치 역할을 맡은

시미즈 히로야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예상하지 못한 공간에서 맞닥뜨린 딸과 연쇄살인범


<실종>에서 봉준호의 느낌이 난다면

가타야마 감독이 봉준호의 단편 <도쿄!>의 연출부였고

<마더>의 조감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실종>의 부녀 관계는

<마더>의 모자 관계를 이중으로 뒤집은 설정이다.

<마더>가 정신지체가 있는

아들의 살인 누명을 벗기려 안간힘을 쓰는 어머니가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맞닥뜨리는 이야기라면,

<실종>은

아내를 잃고 절망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다 사라진

아버지를 찾은 딸이 경악할만한 진실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마더>의 어머니는 춤을 추는 것으로,

<실종>의 딸은 탁구를 치는 것으로

어떻게든 충격의 여파를 버텨내려 애쓴다.


가타야마 감독의 데뷔작 <벼랑 끝의 남매>는

창대하게 시작은 했지만

결말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데뷔작을 만드는 신인감독들이 밟기 일쑤인 전철을 답습하지만

관객에게 전하고픈 주제를 어떻게든 전하겠다는

뚝심만큼은 보여준 영화였다.

그 뚝심은

그다음으로 만든 이 영화 <실종>을

뛰어난 작품으로 만들어내고

OTT 디즈니플러스의 <간니발> 시리즈를 연출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실종>에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도주 중인 야마우치에게

먹을 것과 거처를 제공하는 노인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캐릭터로 보인다.

그렇지만 실종된 아버지를 찾는 전단지와

야마우치의 수배 전단지가 나란히 붙어있는 장면 같은 빼어난 장면들은

그런 단점을 충분히 가리고도 남는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찌르레기 씨”를 덮칠 뻔한

오토바이 운전자를 향해 사토시가 내뱉는

“사람을 죽일 뻔했잖아”라는 말도

전후 맥락을 놓고 보면 재미있는 대사다.



<실종>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영화를 마무리하는 탁구 장면이다.

실종사건과 연쇄살인범 관련 사건이 모두 마무리되면서

부녀는 이전의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탁구장 문을 다시 열었고

딸의 남자친구는 아버지에게 탁구를 배운다.

그런데 아버지를 살아 숨 쉬게 만드는 활력소는 따로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스러운 일인데,

딸은 그 비밀을 눈치채고는 그걸 직접 확인하기에 이른다.


이윽고 부녀가 탁구를 친다.

카메라는 부녀가 탁구공을 주고받으며 벌이는

기나긴 랠리를 미동도 않고 바라보기만 하고,

그 화면에 비밀에 대한 부녀간의 대화가 깔린다.

딸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아버지가

받지 못한 공이 땅에 떨어진다.

부녀는 힘들었던 시절에

삶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줬던 장난을 친다.

그때는 아버지가 장난을 쳤지만

이번에는 딸이 장난을 친다.

그러고서 부녀는 탁구공 없이 탁구를 치는데,

탁구공이 없는데도 탁구공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감당 못할 진실은 앞으로도 계속

그들의 머리를 두드려 이런 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들 거라는 양.



이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이 또 있다.

경찰의 의심에서 벗어난 아버지가

묻어놓은 돈을 찾으러 간 장면이다.

<실종>은 수수께끼 같은

실종사건의 미스터리를 솜씨 좋게 풀어내는 영화이면서도

“살려는 욕망, 죽고 싶다는 욕망,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망, 돈에 대한 욕망” 등에 관한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도 한데,

이 장면은 그런 질문이 집약된 장면이다.

묻어 놓은 돈이 온전히 있는 걸 발견한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는 그 돈의 진실을 발견한다.

그의 망연자실한 표정 위에 경찰의 목소리가 깔리면서

그와 관객에게 허탈감을 안겨준다.


그가 이 장면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가 비밀리에 하는 일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진짜 동기가 그것이라서

그는 딸 앞에서 절대로 떳떳할 수 없다는 것을,

이후로도 딸과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야 하며

딸은 보이지 않는 공을 계속 네트 너머로 날릴 것이고

그는 그 공을 받아내느라 전전긍긍하게 될 거라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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