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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Jul 25. 2024

반듯하게 세로로

물줄기 경(巠)

물줄기 경()”

구성 원리가 알쏭달쏭한 글자다.

옥편에는 “巠”에

“물줄기, 지하수, 물이 질펀하게 흐르는 모양” 등의

뜻이 있다고 설명한다.

뜻을 보면 “巠”에 “내 천()”이 들어있는 이유가 이해된다.


그런데 “巠”의 구성 원리에 대한 설명에는

“직기(베틀)에 날실을 걸고 하단에 횡목을 놓은 후

실을 직선으로 당긴 모양”이라고 적혀있다.

“날실”은

 “피륙이나 그물을 짤 때 세로 방향으로 놓인 실”을 가리키는데,

“巠”에 “날실을 거는 베틀”을 가리키는

장인 공()”이 들어있는 이유가 이거구나 싶다.


이렇게 보면 “물줄기”라는 뜻과

“날실을 당긴 모양”이라는 구성 원리가 충돌하는 셈인데,

개인적으로는

“날실”을 거론한 설명이 옳다고 확신한다.

자연 상태에서 물이 일직선으로 흐르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巠”이 들어있는 글자들을 보면

글자들 안에 “반듯한 날실 같은 모양”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기하학에서 원(圓)을 다룰 때 등장하는 단어인

“직경(直徑, 지름)”과 “반경(半徑, 반지름)”에 쓰이는

지름길 경()”은 내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증거다.

지름과 반지름은 똑바로 그어진 직선이지

구불구불한 곡선일리는 없으니 말이다.

“徑”은 십자로의 모양을 본뜬 글자인

의 왼쪽 절반에 해당하는 조금 걸을 척()”

“巠”이 결합된 글자다.


가벼울 경()”

“巠”에 일직선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걸 뒷받침하는

또 다른 글자다.

경쾌(輕快)하다”라는 표현에서 보듯,

“巠” 앞에 수레 거()”가 붙은 글자인 “輕”에는

“가볍고 빠르다”는 뜻이 있다.

수레가 곧게 뻗은 길을 가볍고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왜 그 뜻이 붙었는지 이해된다.


다시 얘기하는데,

베틀로 옷감을 짤 때

세로 방향으로 놓인 실을 “날실”이라 하고

가로 방향으로 놓인 실을 “씨실”이라 한다.

“巠”이 들어있는 글자들은

“세로 방향으로 놓인 날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풀줄기, 나무줄기를 가리키는 글자인

줄기 경()”을 보라.

“풀(草)”을 나타내는,

그래서 “(땅속에) 잠재돼 있던 무엇인가가

(자라나는 풀처럼 지상으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을 가리키는

초두머리()” 이 결합돼 만들어진 이 글자는

땅에서 하늘을 향해 세로로 자라는 식물 부위를 가리킨다.

감자나 고구마, 토란처럼

덩이줄기나 덩이뿌리를 식용으로 활용하는 작물을

“근경류(根莖類)”라고 부른다.


우리 몸의 부위를 가리키는 글자들 중에도

“巠”이 들어간 글자가 있다.

무릎 아래에 세로로 있는 부분을 가리키는

정강이 경()”이 그렇다.


“세로”의 의미를 내포한 “巠”은

지리적 공간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지구상 어느 지점의 지리적 좌표를 표시할 때 활용되는

경도(經度)”를 보라.

“세로”라는 뜻이 있는 날 경()”이 사용된 단어인

“경도”는 지구상에 세로 방향(남북 방향)으로 그어지는 반면

위도(緯度)”는 가로 방향(동서 방향)으로 그어진다.


한의학에서는

인체에 기혈(氣血)이 (물줄기처럼) 흐르는 통로가 있다고 보는데,

그중에서 세로로 난 통로 12개를 “12 경맥(經脈)”이라고 부른다.

“경맥”과 “낙맥”이 합쳐진

경락(經絡)”도 같은 맥락으로 쓰이는 단어다.


가는 실 사()”와 “巠”이 결합해 만들어진 글자인

은 단순히 지리적 공간을 설명하는 단어나

의학용어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땅을 밟고 생활하는 우리와

우리로부터 세로 방향으로 저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신(神) 일 수도 있고 절대적인 진리일 수도 있는 존재가

실과 같은 무엇인가로 이어져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다.

경전(經典)”과 성경(聖經)”

그런 고귀한 존재가 하신 성스러운 말씀들을 담아놓은 책인데,

땅 위의 어리석고 미천한 존재들과

저 높은 곳의 지혜롭고 존귀한 분을 잇는 것이

실 두 줄기가 꼬인 질긴 ()이 아니라

언제 끊어질지 몰라 아슬아슬해 보이는

가느다란 한 가닥 ()이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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