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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Aug 14. 2024

DC에서는 가능하지 않고 마블에서만 가능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이하 <시빌 워>)는

마블(Marvel)이 “돈독”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중독되기 이전에 만든 작품들 중에서,

<어벤저스> 시리즈를 밀고 나갈 동력을 상실한 게 분명한데도

“평행우주를 만들면 만사 OK일 것”이라는

하이드라의 교활한 술수에 넘어가

터무니없는 영화들을 양산하기 이전에 만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시빌 워>는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매끄럽게 흘러가는 스토리라인과

실감 나게 사실적인 액션장면들을

솜씨 좋게 엮어낸 슈퍼히어로 장르의 걸작이다.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슈퍼히어로와

그보다 더 많은 주변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도

각자에게 적절한 사연과 존재감을 부여하며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달하는

스토리라인은 감탄할만하다.


<시빌 워>가 제기하는 진지한 질문들 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슈퍼히어로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다.

로스 장관(윌리엄 허트)은 슈퍼히어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는 영웅으로 보고

누군가는 무법자로 생각하며

누군가는 위험한 존재로 여긴다.”

로스 장관이

슈퍼히어로들의 활동을 통제하고 관리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슈퍼히어로들에게 소코비아 협정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자,

서명 여부를 놓고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와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 충돌하면서

어벤저스 팀은 “내전(시빌 워)”에 돌입한다.



두 진영의 충돌은 “이상”과 “현실”의 충돌이기도 하다.

일반인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가

그 능력을 사용해 위기에 처한 일반인들을 구하는

훈훈한 사례만 존재한다면

그보다 이상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 앞에 펼쳐진 현실은 어떤가?

슈퍼히어로가 가진 능력을 한껏 발휘하더라도

그들은 신(神)이 아니기에 세상을 다 구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위험에 처한 많은 일반인들 중에서

구조할 대상을 선택해야만 하고,

그들에게 선택되지 못한 이들은

슈퍼히어로에게 간택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닥친 위험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토니 스타크가 협정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게 만든 사건에서 보듯,

슈퍼히어로들의 활약은

이른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낳는다.

<시빌 워>는

그런 피해를 입은 이들이 슈퍼히어로에게 갖는 원망과

슈퍼히어로가 느끼는 죄책감,

슈퍼히어로의 활약이 실정법과 충돌하는 지점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다.

캡틴 아메리카를 내세운 제목에서 드러나듯

어느 정도는 캡틴 아메리카의 편을 들지만.



영화는

“복수, 그리고 복수가 일으키는 연쇄작용”에 대한 화두도 내놓는다.

<시빌 워>에는 복수에 나선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토니 스타크는 부모님을 죽인 윈터 솔져에게 복수하려 하고,

블랙팬서는 부왕(父王)을 죽인 윈터 솔져에게 복수하려 한다.

슈퍼히어로들끼리 충돌하게 만든 테러사건의 판을 깐

메인 빌런인 지모 대령의 행동 동기도

어벤저스에게 하려는 복수다.

모두들 자신이 당한 아픔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그럴듯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착수한 복수는 영화를 밀고 나가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시빌 워>는 기막힌 액션 장면들을

연달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탁월한 액션장면들을 연출했던

루소 형제가 후속작인 이 영화에서 빚어낸 액션 신들은

하나같이 훌륭하다.

이 영화의 액션 신들이 탁월한 것은

단순히 현란하고 근사한 액션을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빚어낸 액션들이 이야기와 잘 어우러지면서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역할까지 제대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누가 나한테 <시빌 워>에 연달아 등장하는

훌륭한 액션 신들 중에서

제일 덜 인상적인 액션 신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공항신을 꼽을 것이다.

두 편으로 나뉜 히어로들이

각자의 초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난투를 벌이는

공항신은 역동적인 촬영과 자연스러운 느낌의 CG,

리듬감 좋은 편집이 어우러진 흠잡을 데 없는 장면이지만,

굳이 흠을 잡는다면

인간과 인간이 충돌한다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다른 액션 장면들에 비하면 사실감이 떨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반면,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 솔져가

독일 특수부대를 상대하는 것으로 시작한 후

블랙 팬서와 팔콘이 가세하면서 규모가 점점 커져가는

영화 중반부의 기다란 액션장면은

CG가 많이 사용됐을 텐데도 그런 느낌을 전혀 풍기지 않는,

실제 인간의 몸과 몸이 부딪힌다는 게 체감되는

최고의 액션 신이다.

수직 방향으로 벌어지는 액션과

수평 방향으로 벌어지는 액션은

공간에 대한 느낌을 확실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대로,

이 액션에 참여하는 이들은 액션을 벌이는 동안

자신들이 그런 행동을 취하게 만든 동기가 무엇이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관객에게 확실하게 전달한다.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 솔져가 아이언맨과 맞붙는

마지막 액션장면은

<시빌 워>의 최고 액션 신이다.

각자의 명분과 동기가 뚜렷한 세 캐릭터의 대결은

슈퍼히어로 장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처절한 느낌까지 전달한다.

특히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뒤엉키는 장면은

힘과 힘이 충돌하는 단순한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뚜렷한 명분과 신념을 고수하는 두 캐릭터가

치열하게 맞붙는다는 느낌을 선명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걸출한 장면이다.



한편, 소코비아 협정은

마블 유니버스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마블 유니버스의 (스파이더맨을 제외한) 슈퍼히어로들과

DC 유니버스의 슈퍼히어로들 사이의 큰 차이점은

세상이 그들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느냐 여부다.

아이언맨의 정체는 천재 백만장자인 토니 스타크고

캡틴 아메리카는 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하던

슈퍼솔저 스티브 로저스라는 걸

영화 속의 온 세상이 다 안다.

그래서 <시빌 워>의 UN은 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DC 유니버스의 각국 정부는

슈퍼맨과 배트맨과 원더우먼의 진짜 정체를 모른다.

그들의 정체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정체를 모르니 그들을 통제하고 싶어도

통제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다.

누군지 알아야 통제를 할 것 아닌가?

슈퍼히어로들조차 다른 슈퍼히어로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한창 맞붙어 싸우던 중에

상대방의 어머니 이름이 자기 어머니 이름하고 같다는 사실을 알고는

싸움을 멈추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시빌 워>는 마블 유니버스에서나 가능한 영화이지

DC 유니버스에서는 설정 자체가 불가능한 영화다.


갑자기 이런 영양가 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여러분도 심심풀이로 생각해 보라.

“나한테 슈퍼히어로의 능력이 생긴다면 정부의 통제에 따르고 싶어 질까?

나도 <시빌 워>의 슈퍼히어로들처럼 때때로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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