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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Aug 14. 2024

누구나 마음속에는 코끼리 한 마리를...

코끼리 상(象)

코끼리 상()”이라는 글자를 처음으로 접한 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장기(將棋)를 배웠을 때였다.

앞이나 옆으로 한 칸 이동한 후

대각선으로 두 칸 이동할 수 있는 “象”은

“車”나 “包”처럼 위력적인 기물은 아니었지만,

“象”을 잘 쓰는 고수(高手)의 손에 들어가면

절묘하게 이동하며 상대의 넋을 빼놓는 파괴적인 기물이었다.


장기를 배우면서

장기는 항우(項羽)의 초(楚) 나라와

유방(劉邦)의 한(漢) 나라가 맞붙은 전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잡기(雜技)라는 걸 알게 됐다.

그걸 알고 장기판을 보니

차(車)나 포(包)나 마(馬) 같은 기물은 이해가 되는데

상(象)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내 머릿속에 있는

중국(당시에는 “중국 공산당”을 줄여 “중공”이라고 불렀고

지금의 대만은 “자유중국”이라고 불렀다)은

코끼리가 사는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짧은 지식에 코끼리가 사는 곳은

<타잔>에 나오는 아프리카와

<동물의 왕국> 같은 자연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인도 같은 곳이었지

중국은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의문이었다.

왜 중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바탕으로 만든 잡기에 코끼리가 등장하는 것일까?


기후와 식생이 지금처럼 변하기 이전인 고대 중국에는

황하 유역에도 코끼리가 서식했다는 걸

나이를 먹은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象”은 고대 중국인들이 코끼리를 직접 보고 만든 글자였던 것이다.

중국의 많은 역사기록에 코끼리에 관한 내용이 언급돼 있고

코끼리를 본뜬 유물이 여럿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리고 5~6세기 무렵에는

장강(長江) 북쪽 기슭에도 코끼리가 서식했고

코끼리를 토목공사에 활용했다는 기록에서 보듯,

코끼리는 고대 중국인들과 꽤나 가까운 동물이었다.

그러다 은(殷) 나라 이후에 기후와 식생이 변하고

농경문화가 확산되면서 코끼리 개체 수는 급격히 감소했고,

그러면서 코끼리는

동남아시아와 맞닿아 있는 일부 경계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동물이 됐다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 코끼리는 꽤 귀한 대접을 받았던 듯하다.

앞서 토목공사에 활용됐다는 기록처럼

큰 덩치와 힘에서 비롯된 뛰어난 노동력도 소중했을 테고,

귀중한 공예품으로 가공할 수 있는

상아(象牙)의 출처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큰 존재였을 것이다.


“상치분신(象齒奔身)”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코끼리는 상아가 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영화 <황산벌>에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는 대사가 나온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뒤튼 대사인데,

“상치분신”은

“코끼리는 죽어서 상아를 남긴다”는 말을 뒤튼 사자성어로 보면 될 듯하다.


“象”에는 “모양, 생김새”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코끼리의 생김새를 본 따서 만든 글자인 “象”은

상형(象形)”문자다.

날씨 등을 가리키는 기상(氣象)”에,

그리고 현상(現象)”이나 삼라만상(森羅萬象),” 천태만상(千態萬象)” 같은

단어들에 들어있는 “象”은 다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이다.


코끼리가 중국에 서식하다 없어졌다는 걸 알고 나면,

모양 상()”

인간()”이 한때 존재했다 사라진 코끼리()”

생각한다는 뜻에서 만든 글자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에는 코끼리가 없어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옛날에 코끼리라는 동물이 살았는데 생김새는 이러이러했고 ~”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코끼리가 어떤 모양이었을지 상상(想像)”한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 아닐까?

“像”에 “모양, 형상, 본뜨다”라는 뜻이 있고,

“像”이 “조각상(彫刻像)” 같은 단어에 들어가는 것은

그래서일 거라 짐작해 본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조각상을 볼 때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코끼리를 상상하고 있는 셈이다.


코끼리는 뜻밖의 글자에도 들어있다.

“예상(豫想)”과 ”예언(豫言)” 같은 단어에 들어있는

미리 예()”는 나 여()”와 이 합쳐진 글자다.

“豫”에 “象”이 들어간 연유에 대해서는,

“코끼리는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무덤을 찾아가는 동물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해석과

“코끼리는 본래 의심이 많은 동물이기 때문에

미리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글자”라는 해석이 있다.

코끼리로 장래의 일을 점쳤다는 기록도 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豫”는 “내가 미래를 미리 상상해 본다”는 것에서

비롯된 글자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상상해 본다.


정치적 프레임을 소재로 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 있다.

사람들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더욱더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공산주의 철학자 칼 마르크스로부터 <자본론>을 선물 받은 사람이

자신이 느낀 난처함을

“코끼리를 선물로 받은 기분”이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렇게 코끼리는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한 존재,

규모를 상상해 보게 되는 거대한 존재,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존재다.

“象”이 들어가는 다양한 글자들은

코끼리의 웅대하고 묵직한 존재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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