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철희 Aug 21. 2024

스산한 거리를 걷는 "설탕인간"의 인생과 예술

<서칭 포 슈가맨>

말릭 벤젤룰 감독(1977~2014)의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이하 <슈가맨>)은

미국의 포크록 가수 식스토 로드리게즈(Sixto Rodriguez)를

찾아낸 후 그의 인생 행적과 인생관, 예술철학을 소개한다.

<슈가맨>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게 부끄러워

청중에게 등을 돌리고 노래했다는 로드리게즈가

미국에서는 앨범이 겨우 몇 장만 팔릴 정도로 무명가수였지만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 높던 1970~80년대 남아프리카에서는

“무대 위에서 분신자살했다, 또는 권총 자살했다”는

루머가 따라다니는 “록의 전설” 대우를 받았다고 소개한다.



대중문화계 아티스트의 생애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슈가맨>을 그런 작품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준 요소로는

“슈가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 가진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그리고 관객이 시종일관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드는

탁월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슈가맨>의 전반부에는

생사 여부조차 불분명한

수수께끼 같은 아티스트를 찾아내는 추리물과

대중문화를 탄압하는 체제를 고발하는

사회비판물의 요소가 뒤섞여있다.

그러다가 “슈가맨”을 찾아낸 순간,

영화는 “슈가맨”의 삶과 음악세계를 탐구하는 작품으로 변한다.

<슈가맨>은 똑같은 소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라 하더라도

구성이 잘 된 다큐멘터리는

작품의 수준이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관객의 흥미를 계속 붙들어 매면서

진한 감동을 전하는 구성으로

작품의 수준을 높인 벤젤룰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슈가맨> 전반부의 배경인

1970~80년대의 남아프리카는 폐쇄되고 탄압적인 사회다.

그런데 이 사회의 모습이 굉장히 익숙하다.

똑같은 시기 우리나라랑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유신시대와

12·12 쿠데타로 생겨난 제5공화국의 상황이 떠오른 나는

<슈가맨>을 보면서

그 시대에 “슈가맨”의 노래를 숨어서 즐기던

남아프리카 국민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잘 알려진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첫 부분에 나오는 “엄마,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라는 가사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는 걸 아나?

그래도 그 노래는 폭력적이라는 이유라도 그럴싸하지만,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즐겨 부른 노래들을

금지하며 내세운 금지 사유는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슈가맨>에는 방송 금지곡이 실린 LP판의 해당 부분을 긁어

재생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린 만행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당시 남아프리카 상황을 보며 놀란 것도 있다.

영어권 국가인 남아프리카 사람들이

영어로 노래하는 미국 가수에 대한 정보를

그토록 오랫동안 구하지 못했다니?

영어권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조금만 고생하면 관련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 텐데.

결국 그 시절에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면에서는

“주한미군”이라는 비공식적인 유통 경로가 있는 우리나라가

남아프리카보다 유리했던 것 같다.



1집 <Cold Facts>와 2집을 발매했지만

흥행에 정말 실패한 가수에 대해,

그러고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가수에 대해

궁금해하던 남아프리카 팬들은

그의 노래에 등장하는 지명을 실마리로 삼아

그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방향을 튼 영화는

로드리게즈가 어떤 뮤지션인지를 탐구하고,

전설적인 존재의 실물을 보려는

열광적인 관객들로 가득한 남아프리카 공연을 영상으로 담아낸다.

4 반세기 동안 음반을 통해 목소리만 들어오던 가수의 공연을

라이브로 보게 된 관객들이 환호하는 모습은

비틀스의 <하드 데이즈 나이트>에 나오는 유명한 공연 장면을 연상시킨다.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추리물이자

경직되고 억압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사회고발물인

<슈가맨>의 전반부는 재미있다.

그렇지만 <슈가맨>을 본 관객이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부분은,

그리고 기억해야 할 부분은

식스토 로드리게즈가 살아온 행적,

그리고 예술과 인생과 사회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후반부다.



내가 <슈가맨>에서 제일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장면도

후반부에 등장한다.

로드리게즈가 눈 쌓인 디트로이트의 스산한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이다.

“슈가맨”은 화면에 그의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한겨울 디트로이트의 매서운 추위를 막으려고

코트 깃을 바짝 세우고는

묵묵히 황량한 거리를 걸어간다.

이 장면은 그 길의 분위기가,

그 길을 걸으며 느낀 그의 감정이

그의 멜로디에, 그의 가사에 생생히 스며들었다는 걸 보여준다.

그와 그의 예술의 바탕은

그가 딛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와 이웃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슈가맨>의 후반부는

그가 인생관과 예술철학이 전혀 동떨어지지 않은,

양쪽에서 동일한 목표를 향해 시종일관 같은 궤적을 그려온

보기 드문 아티스트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오늘날 대중문화계의 스타를 자처하거나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주장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장면을 곱씹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가수가 이런 식으로 홀로 스산한 길거리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슈퍼스타가 이런 식으로 길을 걷는 건

경호상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건

그가 그 길을 걸으며 바라본 세상과

그 시각에서 얻은 배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티스트 각자가 추구하는 삶과 예술의 바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틈틈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슈가맨>은 오래전에 히트곡을 불렀지만

오랫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가수들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에 영감을 줬다.

이 프로그램에 나온 가수들 중에는

긴 세월 대중에게 잊혔다 프로그램 덕에 인기를 되찾은 스타들도 있었고,

프로그램 덕에 또다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며

대중의 관심을 받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가수들도 있다.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사람이 “인기”를 쫓는 것이 그릇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슈가맨>은 보여준다.

그렇게 얻은 “인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슈가맨>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을 잠깐 기쁘게 해 주고는

오래지 않아 큰 실망감을 안겨준 가수들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전에 반드시 <슈가맨>을 감상했어야 한다.

“슈가맨”이 반짝 인기를 얻고 나서도

결코 “슈가맨”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슈가맨다움”을 단 한 순간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했어야 한다.



1942년생인 “슈가맨” 식스토 로드리게즈는

2023년 8월 8일에 영면에 들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난 7월에 타계하신,

“슈가맨”과 비슷하게 사회 현실을 반영한 예술을 지향하며

대중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던 김민기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작가의 이전글 누구나 마음속에는 코끼리 한 마리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