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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Sep 11. 2024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이터널 선샤인>

이 글을 쓰기 위해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봤다.
이 영화를 본 게 이번이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일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전에도 이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이번에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나는 지금도 영화에서 메리가 낭송하는,

영화의 제목을 제공하기도 한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가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의도로 영화에 삽입된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영화의

중심 뼈대가 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안다.

“여자친구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갈라선 조엘(짐 캐리)이

이별의 고통에 시달리던 끝에

클레멘타인과 나눈 사랑에 대한 기억을 제거하려고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인 라쿠나를 찾아가지만

기억을 지우던 와중에 마음을 고쳐먹고는

그녀와 사랑했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내가 정리한 내용이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가?

만약 일치하지 않는다면...

라쿠나를 찾아가 기억을 지우고는 영화를 다시 보도록 하라.



내가 정리한 내용이 맞는다고 치고 얘기를 계속해보자.

문제는 감독인 미셸 공드리와 시나리오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

이런 전제의 주위에 곁가지로 집어넣은 요소들이

이 영화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한다는 것이다.

장면마다 바뀌는 것 같은 클레멘타인의 머리색깔이 그런 요소에 해당한다.



삭제하려는 기억의 소유자인 조엘과 달리,

이 영화에는 여러 버전의 클레멘타인이 등장한다.

조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클레멘타인과

현실에서 패트릭(일라이저 우드)의 농간에 놀아나는 클레멘타인과

기억을 지운 조엘이 다시 만난 클레멘타인 등등.

게다가 공드리 감독의 선택에 따라

클레멘타인은 툭하면 머리를 다른 색깔로 염색하고는 등장한다.

그 결과 이번에 보는 장면에서

클레멘타인의 머리가 분홍색인지 파란색인지 신경 쓰다 보면

그 장면이 조엘의 기억 속 장면인지 클레멘타인이 살아가는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고 그래서 영화를 이해하는 데 방해를 받기 일쑤다.


나는 왜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영화에 대한 끝내주는 글을 쓰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으려고 찾아올 텐데...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는 분석의 대상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는 것.



카우프만과 공드리는

관객이 감정적으로 감상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라며 영화를 만들었지

냉철한 이성으로 분석하기를 원하면서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처럼 영화를 분석하겠다고 나서는 놈들을 방해하려고

영화에 많은 장치를 만들어 넣었을 것이다.

클레멘타인과 사랑하던 기억을 잃지 않으려는

조엘의 애절한 심정에 공감하며 사랑의 의미를 곱씹어봐야 할 영화를 보는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이것저것 시시콜콜 따져가며

영화를 분석하려 드니 영화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영화를 좋아하는 걸까?

기차에서 이뤄진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두 번의” 첫 만남과

살짝 금이 간 빙판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연인들 같은

낭만적인 장면들과 설정 때문에 그러는 걸 거라고 짐작한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의 두려웠던 기억으로 도망도 가보고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도망도 가면서까지

클레멘타인과 사랑했던 기억을 지키려는 조엘의 절박함에

관객이 깊이 공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드리 특유의 솜씨가 발휘된,

CG 사용을 절제한 독특한 비주얼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배우의 무릎을 합성해서 만들었다는 기억 속 인물들의 기이한 얼굴을 보라.

클레멘타인이 일하는 서점에 진열된 책들의 표지가

서서히 바뀌어 가는 기이한 장면을 보라.

기억을 지키려 숨어든 집에 물이 밀려들고

집이 서서히 무너지는 장면들을 보라.

공드리는 공포영화에 등장시켜도 무방할 법한 비주얼로

로맨틱한 영화를 연출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내게 있어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영화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영화에는 바닷가의 무너지는 집이라는 비주얼로 대표되는

“풍화되는 기억”이 등장한다.

“기억의 미화”도 등장한다.

라쿠나에서 받은 카세트테이프에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를 향해 쏟아냈던 험담이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두 사람의 머리에 그런 껄끄러운 기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두 사람이 가진 것은 그들에게 행복을 안겨줬던 장밋빛 사랑에 대한 기억뿐이다.



영화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많다.

앞서도 얘기한 두 사람이 빙판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는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은

두 사람이 하얀 눈이 쌓인 바닷가에 놓인 침대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눈 쌓인 바닷가”와 “침대”는 쉽게 연상되는 이미지 조합이 아니다.

그런 두 대상이 하나의 화면에 담긴 결과,

우리는 이것이 조엘의 기억 속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된다.



기억이 아니라 꿈이 소재인 영화이기는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에도

주인공들이 바닷가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나온다.

생물학은 지상의 생명체는 바다에 있던 생명체가 육지로 올라온 뒤

진화가 일어난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진화의 역사는 인류의 DNA 깊숙한 곳에, 무의식 깊은 곳에

“바닷가에서 깨어나는 것은 의미심장한 행위”라는 인식을 심어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다시 보면서 새롭게 발견하고 곱씹어보게 된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먼저, 회사에서 짐을 싼 메리(커스틴 던스트)가 짐을 옮기다

스탠(마크 러팔로)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

우리는 이전 장면을 통해

메리가 유부남 하워드(톰 윌킨슨)를 사랑했다가 기억을 지운 뒤에도

또다시 하워드를 사랑하게 됐다는 걸 알았다.

메리는 스탠을 통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메리가 하워드를 사랑하다 쓴 맛을 봤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리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걸 알게 된다.

뒤늦게 자신이 비참한 처지가 됐다는 걸 깨달은 메리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한 번 사랑했던 상대에 대한 기억을 지운 뒤에도

그 상대를 다시 사랑하게 된 메리의 사랑이야말

흔한 말로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이터널 선샤인>은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또 보여준다.

영화의 결말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시 만나는 장면에는

서로를 디스 하는 녹음이 재생된다.

당사자뿐 아니라 관객 입장에서 들어봐도 민망한 얘기들이 큰소리로 들려오는데도

두 사람은 재결합하려는 의사를 내비친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랑”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터널 선샤인 2>를 만들고 두 사람의 기억을 다시 지운다면,

그때도 두 사람은 기차에서 “세 번째”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될까?

기억을 지워도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취향은 그대로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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