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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은 Sep 09. 2024

민빚재로

짧은 소설


  아버지, 미미재 생각나?

  그럼 생각나지.

  어릴 적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고 밤에 아버지랑 미미재 넘어 공전역에서 기차 탔었는데 기억나?

  아니.

  내 모든 무서움, 두려움의 근원은 아마도 그날일 거야. 희미한 달빛이 있었고 검은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 뒤에서 누군가 낚아챌 듯 팽팽한 긴장감, 그때 뒤를 돌아보았다면 난 여기 없을지도 몰라, 흐흐.

  그때는 읍내 나가려면 공전역에서 기차 타거나 수 십리를 걸어가야 했지.

  아버지, 이곳도 시골인데 구곡리는 정말 산골이야, 그치?

  그래, 골짜기가 아홉이어서 구곡인데 얼마나 오지겠어.

  나란히 걸을 수도 없는 좁은 고갯길을 말 한마디 없이 걷는 아버지와 멀어지지 않으려고 종종걸음이었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 뒤로 밀리며 저 멀리 굴탄리 마을 불빛이 하나둘 보일 때의 안도감, 은하철도999호 같은 기차 좌석에 앉아 바라보던 어둠에 묻힌 겨울 창밖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해. 아버지, 할머니집 앞 도랑은 생각나?

  그럼, 지금은 물이 거의 말랐어. 

  물풀들 헤치고 족대질하던 거며 그 개울에 대한 추억도 정말 많은데.

  그 당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소나무가지로 냇가를 막으면 그 속에 민물장어가 많았어, 장어껍질을 말려 문고리에 걸어 쓰면 질겨서 오래갔지. 팔당댐 공사가 시작되고 장어가 싹 없어졌지.

  팔당댐? 거리가 얼만데. 아버지, 팔당댐이 맞어? 댐 착공이 1966년이고 완공이 1974년이니 얼추 시기가 비슷하긴 하네. 

  앞 도랑보다 미미재 넘어 굴탄리 냇가에서 물놀이와 고기잡이를 많이 했지. 거기가 물이 많고 더 깊어. 대나무나 기다란 막대기에 낚싯줄을 걸고 민물 가에 흔한 ‘고네’라는 벌레를 미끼로 사용했어. 피래미가 많았고 비늘 없는 중타리가 꽤 잡혔어, 그때 재밌었지.

  어릴 때 내가 만진 문고리 중에 장어껍질 말린 문고리도 있었겠네, 난 몰랐는 걸. 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상골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외할머니 집이었잖아. 막내 외삼촌이 나보다 서너 살 어리지? 그래도 외삼촌이라고 우리 데리고 잘 놀아 줬어. 겨울에 오함마 들고 개울로 내려가 돌덩이를 내리치면 밑에 있던 물고기가 기절해 떠올라, 그걸 작은 소쿠리로 건져 올리며 추운 줄도 몰랐지. 난 왜 무섬증이 많았나 몰라, 제사 지내고 지방 태운 잿물 마시면 무섬증이 없어진대서 거의 내 차지였지. 

  어려서 그랬겠지.

  아버지는 친아버지도 아닌 의붓아버지 밑에서 어땠어? 할아버지가 좀 인색했잖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고, 언제나 배고팠지, 돈도 없었고. 어쩌다 술 생각이 나면 바지 댓님 속에 쌀을 숨겨 나갔어. 그때는 지금 같은 비닐봉지가 없었지. 쌀값에서 술값을 제하고 돈이 남으면 거스름돈을 받기도 했는데 그렇게 돈을 만져볼 수 있었지. 

  쌀값이 좋았나 보네.

  그럼, 지금 같지는 않았지. 그 노인네가 그래도 너 밥 먹는 건 안 아까워했어. 추수 끝난 논에 벼이삭 주우러 잘 따라다니고 겨울에 사랑방에서 가마니 짤 때 가마니틀 옆에 붙어 앉아 지푸라기 잘 다듬어 주었지. 

  맞아, 억지로 하지는 않았어, 내가 좀 진득했던 거 같아.

  농사철이면 밤낮 농사일하고 겨울에는 새끼줄 꼬고 산에 나무하러 가고 그랬지, 머슴살이나 마찬가지였어. 

  난 거의 빈 집과 있었던 기분이야. 닭이 마루 위를 돌아다니면 발자국이 선명했어, 쫓으면 다시 올라오고 그랬어. 외양간의 소, 잔뜩 쌓인 땔감, 농기구 걸린 헛간, 쌀가마니와 곡식자루가 들어 있던 광, 장독대, 습기 고인 뒤란, 어두침침한 마루 밑, 쇠죽 끓이는 커다란 솥이 뿜는 김, 흙 담에 내려앉은 잠자리, 집 뒷길 향나무 아래 물 긷던 옹달샘, 햇볕 양양하던 집 앞 논밭과 이어진 개울 그리고 마을 전경. 이 모든 게 내 유년기를 감싸고 있는 기억들이야. 커다란 짐자전거 뒤 노란 바구니에 앉아 산 아래 참외밭인 지 담배밭인 지 갔던 기억도 있어, 구곡인 지 마곡인 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기억나?

  모르겠는데.

  아버지와 내 기억이 완전 다르네. 미미재 입구를 등지고 할머니 집이 있잖아, 주위에 다른 집이 없었지. 집 앞으로 너른 논과 밭이고 개울 저 너머 집들이 나란히 있었잖아. 어느 날, 상여가 할머니 집 앞을 지나 산으로 가야 했나 봐. 좁은 논둑길을 지나며 양쪽으로 맨 상여 한 편이 어쩔 수 없이 논으로 빠져서 갔는데. 

  길이 좁았으니까.

  미미재에 상엿집이 있지 않았어? 그래서 더 무서웠던 거 같은데. 공전역도 가보고 싶다.

  지금은 기차 안 다녀, 타는 사람이 없어서. 

  알아요, 역사(驛舍)는 그대로 있잖아요. 삼탄역을 지나와 공전역→봉양역→제천역 이렇게 다녔는데 공전역만 2008년 12월 중단되었네요. 아버지 ‘민빚재로’ 아세요?

  민 뭐? 그게 뭐여.

  미미재도 없어졌잖아요.

  응, 다 까뭉개서 차 다니는 길이 됐지. 차로 오 분이면 넘을 걸. 

  도로명으로 모든 주소가 바뀌면서 미미재가 민빚재로로 남은 거 같아요, 어떤 연유로 빛도 빗도 아닌 빚이 되었는지 궁금하네. 민낯, 민물, 민소매, 민머리처럼 없음을 뜻하는 접두사 ‘민’으로 본다면 무엇이 없거나 결여의 뜻이 있으니, 빚이 없는 고개? 그니까 빚이 엄청 많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이 그 고개를 넘고 보니 새삼 빚이 아니었다더라 뭐 그런 뜻인가. 또 낚시에서 미늘이 없는 민바늘은 물고기에게 상처를 덜 주기도 하는 것처럼 좋은 뜻이겠죠? 아무튼 민빚재, 은근하면서 그윽한 어린 날의 내 추억과 닮아서 좋아요.

  당최 몬 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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