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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만세 Dec 04. 2024

김여사, 나의 어머니 #3

나도 요즘 궁금한 나는 누구인가? #5

마나님과 카페에 앉아 24년 12월이 진짜 스펙터클하다는 얘기를 하며 농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나님이 피식 웃었다가, 채신머리없이 이 와중에 농담이냐며 살짝 얼굴을 붉힙니다. 빵 한쪽 잘라서 커피에 찍으며, 김여사 님께 배운 인생 신조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웃어야 지나가요. 웃어야 견딜 수 있어요. “




김여사의 결혼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옛날 기준으로도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시댁 식구들은 별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 김여사를 구박했고, 손찌검을 예사로 했습니다. 동네에 사는 이웃들이 김여사를 데리고 나와 아랫동네 새댁은 도망쳤다더라, 윗동네 여자는 이혼했다더라 계속 이야기했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읜 김여사는 자식들 걱정에 차마 갈라서지 못했습니다. 자기마저 없으면 아이들이 어떤 꼴이 될지 불 보듯 뻔했지요. 자식들이 김여사에게 진 부채감은 커서도 지워지지 않았고, 훗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단칸방에 신혼살림은 공장 사모님이 들여준 장롱과 찬장으로 쓰는 사과 궤짝만큼 한눈에 보기에도 기괴했습니다. 다섯 형제의 장남이 었던 아버지는 자기 식구들을 굶긴다고 김여사에게 손찌검을 했고, 김여사는 졸지에 시어머니에 주정뱅이 남편에 딸린 식구 넷을 먹여야 하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딸들까지 태어나면서 살림은 더 어려워졌고, 남편보다 더한 시어머니는 왜 아들이 아니냐며 김여사에게 손찌검을 했습니다.


막내아들이 대여섯쯤 되던 해, 김여사는 남편 술주정에 맞아 왼쪽 고막이 터졌습니다. 김여사는 옆집에 숨었다가 다음날 직업소개소를 찾아갔습니다. 정말로 마음을 굳게 먹은 김여사는 많이 배운 부부의 집에 식모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눈에 밟혀 가만히 전화를 돌려 봤는데, 다섯 살이나 될까말까 한 아들이 전화를 받았답니다.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자, 누나들은 학교에 갔고 아버지는 술 먹고 자느라 굶었다고 했습니다. 몰래 먼발치에서 본 삼 남매는 한 달 사이에 살이 쪽 빠져 있었고, 그렇게 김여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45년쯤 뒤에, 그 얘기를 들은 아들은 김여사의 손을 잡고 그때 일에 감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사라지고 없음에 용서를 구했습니다.


시댁 시구들의 횡포는 20년쯤 지나 김여사의 아들이 작은 아버지의 멱살을 잡아 길바닥에 내 꽂아 버리고, 귀싸대기를 후려 치려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뜯어말리며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아버지가 김여사 몰래 아버지를 보증인으로 세워 대출을 받았다는 것을 안 아들은, 을지로 일대의 은행을 하나씩 돌며 아버지 이름으로 된 대출이 또 있나 샅샅이 뒤졌고, 소문이 두려워진 작은 아버지는 바로 돈을 갚았습니다. 그 뒤로 김여사의 아들에게는 가정교육이 엉망이다, 지 애비를 빼닮았다는 손가락질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날, 한숨도 못 잔 김여사는 조용히 아들을 불러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창창한 네 앞날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런 걸 보려고 내가 참고 산 것이 아니다 타일렀습니다.


자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자기 손으로 돈을 벌 나이가 되면 집을 나갔습니다. 등록금만 집에서 해주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한다는 일종의 룰이 정해졌고, 그렇게 자식들은 새벽 동대문으로, 학원 과외로, 도서관 아르바이트로 분주했습니다. 생전 돈이라고는 벌어 본 적이 없는 남편은 기가 막히게 좋은 팔자를 타고났다고 했습니다. 아내복, 자식복, 재물복을 다 가져서 30년 경제 부흥 속에서 재개발을 세 번이나 해 재산을 불렸지만, 꽉 움켜쥐고 십 원짜리 하나 내놓지 않았고, 피곤에 지친 자식들은 지하철에서 자다가 종점까지 가거나, 잦은 코피에 혈관이 헐어 주기적으로 코를 지지곤 했습니다.


자식들이 대학에 갔을 때, 외가와 친가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학원 근처에도 못 가본 애들이 대학에 가자, 외가에서는 집문서를 훔쳐서라도 공부를 시키라 했습니다. 자식들이 공부를 안 해서 문제지, 공부하겠다는 자식들 앞길을 가로막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며, 특히 유난히 글을 잘 짓는 둘째 딸이 너무 아깝다 했습니다. 둘째 딸은 국민학교 때 문교부 장관상을 받았으나, 그때도 무슨 시답지 않은 일도 상을 받으러 가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은 커서도 그런 원한들을 삭이지 못하고 형제들과 계속 갈등을 빚었습니다. 친가에서는 다 키웠으면 일을 시켜야지 공부를 가르쳐봐야 어디에 쓰겠냐 핀잔을 주었습니다. 아비를 빼닮아 하나같이 성질머리가 더러우니, 잘 풀릴 리 없다고 흉을 보았고, 김여사는 평소답지 않게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렇게 친가 쪽 식구들과는 차츰 연을 정리했고, 김여사를 옭아매던 족쇄들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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