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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동강오리알 Jun 18. 2024

지난 6년간, 5번의 이직을 한 이야기

곧 만 35가 되어가는 남자의 삶의 경험담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올린다

나란 사람에 대해 설명하자면 너무 복잡하고 서론이 길어질 테니.. 간략하게 지난 6년간 5번의 이직을 한 경험을 공유하고자 끄적여 본다. 사실 난 글 쓰는데 소질이 없기에 실수가 있더라도 많은 양해 부탁드린다.


나에 대한 간략한 소개,

- 한국에서 태생

- 고등학교를 뉴질랜드에서 졸업 / 대학교를 호주에서 졸업 (전공: 회계학)

- 뉴질랜드/호주에서 2년간 졸업 후 샐러리맨 경험해 봄

- 현재 할 줄 아는 언어 (한국어, 영어(네이티브), 불어(중급))

- 파주 DMZ 군복무 완료 만기전역


난 현재 룩셈부르크라는 계획에도 없던 나라에 이직성공하여 비자 스폰을 받아 일하는 중에 있는 한국인 남자다.


내 주변 친구들이나 아는 지인들도 항상 묻는 질문이 있는 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직 계획한 거냐?"라는 질문이 그중 하나다.  난 살면서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면 한 회 사에서 몇 년 일하고 또 다른 회사에서 몇 년 일하고 이직해야지~ 이러고 작정하고 회사 다니려던 사람도 아니었고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 회사에서 고즈넉이 열심히 회사를 40년 잘 다녀서 정년퇴직하고 그런 삶을 살겠지 마음먹고  다니게 된 첫 회사가 호주였던 기억이 난다.


단, 내 이야기는 나에겐 다른 이들과 다르게 이민에 도움 되는 학과 전공을 했음에도 불구.. 호주의 급변한 정치계의 태도와 이민법 변화에 따른 피해자가 되어..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의 삶이 시작된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2년 8월에.. 호주에서 대학 졸업 후 난 당연히 기존의 이민법에 따른 영주권을 절차대로 2012년 내에 받고 탄탄대로의 호주에서의 회사생활을 이어나가게 될 줄 알았던 나에게.. 그 당시 새로 당선되었던 총리의 이민법 변경으로 인해 호주에서 더 이상 비자 없이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되었고.. 회사로부터 비자 스폰을 받는다는 것 또한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난..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뉴질랜드로 돌아가 이민을 시도하기 위해 뉴질랜드에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 후 입국하여 회사 취직 및 일을 시작하게 되지만.. 뉴질랜드 에서조차도.. 이민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된 난.. 2013년 12월 귀국길에 오른다.. (군대 미필자로 인해 여권이 12월이 만료예정이었던 상황)


그렇게, 2014 3월 - 2015 12월 우여곡절의 군생활을 마친 뒤 한국에서 이런저런 알바도 뛰어보고.. 호주로 돌아갈 비자와 방도가 있는지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미 이민법은 더 강화되어.. 갈 수 있는 방도가 없음을 깨닫게 되어.. 한국의 한 대만계 물류회사의 회계팀에 대리로 취직하게 된다. 이곳에서 시스템적으로나 업무적으로 배워야 될 것들이 많았지만.. 금방 난 또 잘 배워갔기에 적응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한국에서의 회사생활은 업무적인 면에서 불만 사항은 없었으나.. 매번 반복되던 야근과 회식에 1년이 넘어갈 때쯤 너무 지쳐버린 난.. 호주에서의 회사생활이 그리웠기에.. 또 한국만 아니면 유럽/미국이든 서양권이면 이런 야근 따위는 안 할 텐데 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해외로 취직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렇게 한 번의 이직을 하게 된다.


2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미국등 여러 나라에 취직을 위해 반복적 시도 끝에 난 극적으로 프랑스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승인받아한 미국계 유명 대기업에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 다른 회계시스템인 SAP에 적응해야 됐고 재무 팀의 회계 관련 업무를 하다 어느 순간 매니저의 요구로 인해 FP&A 팀에 합류하여 즉 SAP 시스템 구축 및 테스팅 등 회계프로세스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도록 지시받게 되어 2년간 이곳에서 일하게 된다. 이곳에서의 워라밸은 가히 최고로 출근시간 9시에 퇴근은 4시-4시 반 사이에 하였다. 난 당연히 이곳에서의 생활을 만족했기에.. 이렇게 5년만 이곳에서 살면 영주권 받고 느긋한 삶을 살 수 있겠구나.. 하며 즐기던 2년 차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미국계 회사이던 내 회사의 본사에서 프랑스 지점의 인력감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나는 그렇게 다른 직장 동료들과 함께 회사에서 방출되게 된다..


그렇게 다시 다른 유럽지역에서의 비자스폰을 받아 다닐 회사들을 찾기 위해 링크드인을 통해 이력서를 여기저기 돌리던 중 정말 운이 좋게도 코로나 시작 전인 2020년 2월 중 루마니아에 위치한 한국계 대기업에서 SAP 관련 구축 경험 있는 실무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 후 비자 스폰을 받아 그렇게 루마니아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렇게 두 번째 이직을 하게 된다.


한국계 대기업을 다녀 본 적이 없으니.. 이메일 쓰는 방식부 터해서 사소한 대화 방식등을 다시 배워야 했던 나는 정말 많이 고생했다.. 현지직원들과는 정말 잘 지냈으나.. 내 위로 부장님들이나.. 과장님들 또 특히 한국 본사에 있는 부장님들의 갈굼과 매일 아침 7시 - 새벽 3시까지 업무 보던 나의 일상의  1년이 정말 괴로웠다. 그렇게 장기적으로 버티려던 나의 계획은 1년 3개월 차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것도 새로 본사에 의해 임명된 새로운 부장님의.. 스타일에 단순히 내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업무 스타일은 그렇게 갈굼 당하면서도 노력한 끝에 과거 부장님에게 인정받던 스타일이었으나... 나의 PPT, 워드, 엑셀 등 모든 것들이 그냥 맘에 안 드신다며 날 내치신 부장님의 눈빛과 얼굴의 짜증이 아직도 기억난다.. 회사 이미지상 또 새로운 부장님의 이미지상.. 업무상 내가 잘못한 적 1도 없던 내게.. 꼬투리 잡기 모 했는지.. 나에게 권고사직형태로 나가길 강조당하여.. 그렇게 난 또 세 번째 이직을 하게 된다..


다행히 이번의 이직은.. 내가 있던 회사의 다른 지점.. 네덜란드 지점의 아시던 분들과 또 본사에서 날 좋게 봐주시던 분들의 소개로 난 동일한 회사의 네덜란드 지점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2021년 6월 네덜란드지점의..

팀원 7명이던 재무부서로 옮기데 되었고 그곳에서의 삶은 참 평탄하고 온화하고 좋았던 기억뿐이다.

다만, 너무 내겐 무료했던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매월 비싸게 내던 월세만 1200유로 그에 반해 들어오는 월급은.. 대기업치곤 너무 짜게 주었던 회사.. 사실.. 먹고 자고 살 수 있다면.. 그 삶에 만족하며 살 수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단순히 더 높은 직위와 직책을 가지게 되면 더 많은 돈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던 직원 동료들도 나쁘지 않았으며.. 직장상사도 나쁘지 않았으나.. 내 내면의 문제로 그렇게 갉아먹기 시작하던 난.. 어느 날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인생 크나큰 선택의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무료하게 일 열심히 하던 어느 2022년 1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 다름 아닌 영국의 위치한 유명한 헤드헌터 에이젼시였다.. 난 다짜고짜 내 번호를 알게 된 계기와 전화연락한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에 답은 참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답변이었다..


루마니아 이직 전 여기저기 돌렸던 내 이력서를 보고 이직자리가 나서 연락한다며 그렇게 연락 온 것이었다.. 이번엔 미국계 대기업인 컨설팅 회사에 자리가 났으며.. 위치 또한 아일랜드라는 영국 옆의 섬이었던 것..


컨설팅 쪽에서는 경험이 전무했기에.. 그 당시 네덜란드지점의 한국계 대기업에서 받던 연봉보다 삭감된 수준을 오퍼 했음에도.. 난 그 길을 선택하고야 만다. 내가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이직으로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영어권 국가의 이민.. 그리고 영어로만 대화해도 다 통하는 그런 삶이 죽도록 그리웠던 나는..

다른 무수히 많은 좋은 점들이 네덜란드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과거의 향수병과.. 또 이직하면 진급을 또 빠르게 할 수 있을 거야 라는 순진한 도전적인 마음에.. 그렇게 네 번째 이직을 하게 된다.


뉴질랜드와 비슷한 나라로 추측하여 생활도 정말 편할 것이라 착각을 한 나는 그렇게 2022년 6월 아일랜드로 입국한다.. 당연히 이 회사에서도 비자 스폰을 받았으며 입국 후 절차들은 내겐 누워서 떡먹기였다.

장기숙소 찾기/은행계좌오픈/핸드폰개통/와이파이개통/공과금관리 등등 항상 밥먹듯이 해왔던 것들이기에.. 1주 만에 장기숙소 및 은행계좌 모든 것들을 완료 후 회사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 아일랜드에서 하게 된 업무도 SAP 관련 업무를 주로 하게 될 줄 알고 온 것이었으나.. 그것은 큰 착오였다.. 컨설팅이라는 회사자체 개념은.. 프로젝트별 직원을 엄선하여 그 프로젝트를 담당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그 프로젝트가 내가 평소에 알던 시스템이든 아니든 무조건 해야 되는 형식이었던 것..

마치 군대에서 까라면 까리지 뭘 말이 많아.. 와 똑 닮은 시스템이었다..

군대를 다녀왔던 나이기에 또 배우면 금방 하겠지.. 라며 그렇게 1년 차는 무난히 지나갔으나.. 2년 차부터.. 뭔가 억울한 일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업무를 더해야 된다며 현지 직원들은 프로젝트 하나도 안 해도 돈 따박따박 받으며 다니는 반면.. 난 프로젝트를 어느 순간부터 2-3개씩 겹쳐서 주기시작하여.. 어느덧 한국에서와 비슷한 업무 시간을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하나로.. 인도 직원들이 상사로 너무 많이 있었으며.. 이미 외국인들은 비자 스폰을 해주기 때문에 일을 더해야 된다는 마인드가 접목된 회사 같았다.. 난 그렇게 군대처럼 버티면 되겠지 또 2년만 버티면 영주권이 나온다는 아일랜드 이민법에.. 현혹되어..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던 난 결국.. 2023년 중반 이후.. 번아웃과 함께 심한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우울증이 심했던 다는.. 집/회사/헬스장 만 반복하여 생활하다가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2024년 1월 말 퇴사를 하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내게 스위스에 있던 프랑스 여자친구가 본인 집에 머물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떠냐는 제의에.. 나도 힐링할 겸 나쁘지 않겠다 싶어.. 90일 비자로 여자친구 집에서 지내며 링크드인으로 또 한국 포함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고 면접도 보던 중.. 의도치 않은 곳에서 면접제의를 받게 된다..


룩셈부르크에 위치한 거의 스타트업 사이즈의 소규모 Finance 서비스 회사인데.. 첫 화상면접 날 내가 지원했던 회계직보다 이력서상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다양한 시스템 구축과 회계 관련 지식/경험/업무지식등을 고려해서 HR 임직원의 내가 입사 시의 향후 5년간의 나에 대한 계획표를 준비해 온 것이었다. 내가 지난날들의 이직했던 방식과 살아왔던 방식을 뒤돌아 보면.. 단 한 번도 이런 제의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놀랍기도 하고 현실적인지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지만.. 일단 두 번째 화상면접과.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대면면접까지 보게 되면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1개월 휴식 후 난 5번째 이직을 하게 된다.


2024년 5월 룩셈부르크에.. 오게 된 난 참 많은 감정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의 휴식 기간 동안 내면의 행복을 찾게 되었으며 이젠 직장에서 찾지 않아도 됨을 깨닫게 된 나로선 더 이상.. 진급이나 직위/직책에 집착을 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내면의 날 정말 평온한 상태로 만든 나 스스로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이직을 5번 해본 지금..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직장에서 최소 5-10년 이상 근속 해본 사람들..

내가 그래보지 않았기에 기분은 어떤 한지.. 근속한다면 어떤 경험들이 쌓이는지 등등..


아마 이런 분들이 내게도 동일한 궁금증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직을 많이 하면 불편한 점들이 없었는지 등등.. 모티브(동기)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직을 많이 해본 나로선 가히 말씀드릴 수 있다..


매번의 이직이 쉽진 않았다.. 왜냐하면 매번의 이직은 곧 매번 새로운 적응을 해야 되다는 의미이기 때문..

난 그때그때 무엇을 해야 할지 집중하고.. 하루의 일을 끝마치면 또 다음날 무엇을 해야 될지 집중해 보자 라는 마인드로 지금껏 버텨온 게 아닌가 싶다.


나도 앞으로의 계획은 모르겠다.. 단 목표는 확실한 한 가지는 있다.. 이곳이 아니라면.. 한국에 돌아가게 된다면.. 그곳에선 꼭 한 직장에서 오래 버텨보는 게 내 꿈이다..  나의 이직 스토리가 어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끝마친다.



룩셈부르크의 산책로 오르다가 든 생각 “인생의 정답은 없는것 같다 다만 길 잃더라도 반드시 다시 가고자했던 길로 찾게되기도 하고 새로운 길이 찾아지기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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